<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8월호/ 이달의 시인>
신작시: 꽃병 속의 피/ 실재와 실제/ 이슬 프로젝트-52
자선시: 액체계단/ 점화전(點火栓)
시인론: 박동억
신작시
꽃병 속의 피 외 2편
정숙자
진전을 내재한다
견딘 만큼 비옥해진다
고뇌가 덜리면 사유도 준다
그 둘로 인해 지속적으로 연역/발아하는 깊이와 빛을
질투하는
신은,
회수한다
(진정 고독을 사랑할 무렵)
그렇다고 잃어진 그것을 위조해 가질 순 없다
저쪽, 또는 우연만이 생산/보급하는
그것은
캄캄하지만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결국 깨고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혹자만의
혹자를 위한
그 두껍디두꺼운 어둠 속
광학,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석벽의 삶
속의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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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실제
알 수 없는 어느 공간에서, 나는
어둠과 두려움에 새파라니 떨고 있었지
왜 여기 홀로 있으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그 무엇도 모르는 채 온몸 가득 얼음을 채우고 바람 휘감고 갈라지고 있었지.
그런, 한순간
어떤 이가 내 몸을 감싸 안았어
나는 곧바로 녹아버렸지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용한 그 품속에서
얼음은 다시- 반짝- 숨이 돌았고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았으며 무섭지도 않던 거기서
문득
깨어났을 때
나는 몽땅 벌거숭이였지만
점차 알게 되었지
알 수 없는 어느 은하에서 나를 구해준 그분께서는
이곳 이 마당에서까지
온갖 것 내어주고 덮어주시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시는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셨어
그분이 주신 모든 것 당연히 받을 걸 받은 줄로만 알고 희었네
어느 성운에선가 미아였던 나, 안아주신 그 하나만으로도 하늘이었는데… 이 힘든 세상에 왜 날 낳으셨을까? 그런 신음까지를 얼렸던 적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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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프로젝트 52
코비드-19 & 플라톤/ ‘우한 폐렴’에 이어 ‘코로나-19’, 최근엔 ‘코비드-19’라고도 부른다. 이 모두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을 일컫는 용어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연상케 하는 이 급성 호흡기질환은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좀체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 사회적, 전 지구적 현상인 까닭에 추상을 앞선 절박함으로서의 서사를 「이슬 프로젝트」에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詩이자 증언인즉,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도 없고, 모임에서도 개인 간 2m 거리 두기를 실행 중인 현재는 2020년 6월 하순. 일찍이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런 경고를 했다.
“저들은 신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사람을 두 동강이로 쪼개려 하오. 이렇게 하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요. 즉, 그들은 지금보다 약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수가 늘 테니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될 거란 말이요. 그들은 두 다리로 똑바로 서서 걷게 되겠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폭한 짓을 하며 시끄럽게 굴면, 나는 이렇게 쪼개기를 다시 하겠소.”
“만일 우리가 신들께 대하여 단아端雅하지 않으면 다시 반쪽으로 쪼개어질 염려가 있어요. 그때에는 우리가 둘로 짜개진 부신符信 조각 모양으로 코 한복판에서 갈려서 묘비에 부조된 반면상半面像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게 될는지 몰라요. (…) 사실 우리가 이 신과 친구가 되고 잘 사귀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소년을 발견하며 또 그와 더불어 즐겁게 지내게 될 겁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뤼크시마코스와 나눈 저 대화편에서 “신을 공격”했다는 말의 진의는 “자연을 훼손”했다는 의미로 연결해봄 직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스 쇼의 묘비명 이 겹쳐지기도 한다. 불가역적인 엔트로피의 팽창만을 탓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 자연을 아끼지 않았으니 우리 모두 “신을 공격”한 셈이다.
거리 두기, 마스크 착용, 비대면···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우리의 신체를 “코 한복판”에서 “둘로 짜개”는 과정이 아니라고 단언키 어렵다. 남녀 한 몸이었던 인간을 둘로 쪼개어 지금의 모습이라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짜개진”다면 외발로 톡톡 튀어 다녀야 함은 물론, 지혜도 그만큼 줄어들 테니, 그게 바로 신의 대응이리라.
우리는 그동안 동물들에게 부리망을 씌운 채 채찍도 가해가며 일을 부리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도 마스크를 쓴 채 일해야 한다. 입이 열한 개라 해도 할 말이 없을뿐더러, 열한 개의 입에도 일일이 마스크를 씌워야 할 판이다. 기원전 4세기의 상상력이 오늘에 어울리다니! 인간의 혜안과 어둠의 끝자락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 플라톤, 최명관 역,『饗宴』(초판:1966, 17판:1981). 을유문화사, 45~48쪽
자선시
액체계단 외 1편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날개가 푸르네
날개가 솟구치네
다음
다음
다음 기필코 상승하는
건축의 날개들은 수직과 나선, 측면까지도
성운 깊숙이 깃을 들이네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히며 흐르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계단의 승/강은 눈 VS 눈이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눈파는 눈으로는 안녕불가. 생사의 성패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네. 너무 익숙히, 너무 가까이, 너무나 친근히 요주의 팻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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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화전點火栓
가지 않는 시간을 지켜본 적 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앞에 박혔던 시간
24시간 아래 천 년이 지나가던
그 슬픔을 견뎌본 적 있다
밀어도, 흔들어도
소용없던 그- 시간
이 시간이
왜… 또… 찾아왔을까?
온 신경을 묶어버린 이 밧줄이 결국 나를 끌고 갈 것이다. 어떤 기쁨도 주어지지 않는 곳. 그 죽음의 문 앞으로 침묵만을 펼치며, 죽이며- 죽이며- 내 얼굴에 물 뿌리며 끌어갈 것이다.
바위와 비탈의 시간
도무지 이겨낼 장사가 없는
절대 무력의 신神 앞에
날개도 발도 잃어버린 이 병든 시간이
그러나, 마침내 다른 시간을 깨울 것이다
어제오늘이 아니라
언제든,
몹시 익은 허무 속에서
시인론
사랑의 실천
박동억
1. 호명하는 언어
어떤 사물이나 타인이 소중해질 때, 우리는 명명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어린 시절의 장난감, 친구와 함께 지어낸 암호, 가족 사이의 애칭처럼 하나의 고유명에 새로운 이름을 덧씌우고 싶어진다. 그런데 왜 평범하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왜 새로운 이름을 속삭일 때 당신에게 가까워졌다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이러한 기분을 가리키는 적당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소중한 것에 관한 이름 붙이기를 이 글에서만 잠시 ‘호명呼名’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호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향한’ 관계 맺기다. 호명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만 사용하는 이름을 만들어낸다. 호명은 마주함을 향한 기다림이며, 호명하는 자는 지금-여기에서 당신의 응답을 요구한다. 추억을 간직한 사물을 향해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향해서 우리는 이름을 부른다. 손을 뻗듯 말하고, 그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을 때도 애타게 부른다. 그렇다면 호명과는 반대되는 것은 무엇일까. 공적인 삶 속에서 이름은 활자-의미로 환원된다. 프린트된 활자는 누구에게든 똑같은 형태로 발견된다. 활자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어야 하고, 그래서 의미는 누군가에게 더 가까운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같은 거리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언어는 갈림길인 셈이다. 때로 어떤 사람은 그저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쓴다. 한편 어떤 사람은 텍스트의 그물망 속에서 객관적인 중심, 즉 의미에 닿기 위해 투쟁한다.
정숙자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방식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시인의 오랜 습관 하나가 해답의 실마리가 된다. 그는 서른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오롯이 시 쓰기를 견뎌온 시인이다. 그런데 여러 편의 글에서 시인은 시 쓰기보다도 더 오랫동안 그가 소중히 다뤄온 습관이 편지를 쓰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초등학r교 4학년 때부터 자신이 아버지나 이웃들을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뒷집 언니들의 혼인 성사를 돕기 위해 선뜻 대필해주기도 하고, 종단에서 파면 위기에 몰린 스님의 탄원서를 편지글로 옮기기도 했다. 어떤 해에는 수많은 은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일백하고도 열두 매의 연하장”을 쓰기도 했다. 그의 편지를 한 시인이 10년이 지난 이후까지도 간직하여 애장품으로 전시하기까지 했다는 일화는 인상 깊다. 이때 정숙자 시인에게 “사적인 편지는 일인에게 보내는 것이고, 일회성이고 거기 어떤 사심도 끼어들 수 없는 일종의 순수지향의 정신이자 마음”이다. 편지란 응답하고 응답받는 기쁨,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한 ‘순수지향’의 언어다.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파란, 2017)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촌음이 아쉬우면서부터 나는 편지, 메모, 노트, 엽서, 책, 헌 종이로 만든 봉투 등에 연월일시분을 기입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시간. 나와 함께한 그 시각을 사인해 두는 행위야말로 우정이요 사랑이며 기념비라고 찜한 까닭이다.”(「실천이성에 얹힌 파니」) 시간을 기록하는 몸짓조차 사랑이라면, 모든 기록은 편지가 될 수 있다. 아니, 모든 몸짓이 그러하다. 또 다른 산문에서 “우리 집 유리창 밖 후박나무는 누구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그 많은 이파리를 뿜어냈을까.”라고 말할 때 시인의 눈에 후박나무의 잎사귀는 누군가에 선사하는 몸짓으로 발견된다. 편지의 본질이 가까워지려는 마음에 있다면, 시인에게 세상은 편지다. 후박나무가 푸른 잎을 한가득 피울 때 그 밫깔은 세상에 응답하고 응답받으면서 풍경에 녹아든다.
편지는 기억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어쩌면 어떤 순간을 소중히 기억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매 계절을 견디는 후박나무의 푸른 잎을 닮아 있지 않을까. 본래 시간은 막막한 것이다. “내 곁을 지나는 지금 이 순간도 천 년 전에 출발할 시간일 거야.”(「시간의 충돌」)라는 문장처럼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인간 존재 이전에 흘러왔으며, 인간 이후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삶은 일회적인 시간이다. 우리는 그저 흘러간다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추억의 사물을 손에 쥐고, 서랍에 보관하며, 기록하여 남겨둔다. 때론 그것을 꺼내어 한순간을 회상하고 호명해보기도 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무언가를 잊었다는 막막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해마다 피고-지는 몸짓을 반복하는 계절처럼, 인간의 삶이란 무언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잃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 관계를 이해해야 우리는 “내 모든 피는 어머니의 피”(「십 년 후의 메모」)라는 문장을 음미할 수 있다. 삶은 그저 흐르지 않는다. 잎을 피우듯, 피가 맺히듯, 모든 삶은 기억이자 응답이며 움켜쥠이다. 피는 피를 쥐려는 힘으로 흐른다. 그렇게 존재는 매번 맺히고 굳고 스며들기를 반복한다.
정숙자 시인의 시는 응답하고 응답받으려는 순간에 가까워지려 한다는 의미로 편지다. 따라서 “나 자신이 내 형틀이다”(「객담 및」)라는 시구처럼 시인에게 자아는 구속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시적 자아는 ‘나 자신’을 넘어서 성립되는 열린 존재다. 누군가 겸허히 삶을 내려놓는 자리에서 태어나 삶을 지속하려는 마음,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를 향해 산책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들을 간직하려는 수신인의 마음이 시詩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책보다는 바다를 읽어야 한다”(「절름발이 바다」)라고 말한다. 그의 언어는 한 권의 완결된 활자가 아니라 열린 바다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밀려가고 밀려오는 호명이다.
2. 열림과 깊이
호명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가까워지려는 실천이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호명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요청되는 것이다. 호명하는 관계는 차이를 전제하며, 따라서 그것은 섣불리 ‘우리’로 환원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응답이다. 호명이 공동체적 합의의 차원이 아닌, 개인의 대화 차원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호명하는 관계에 속할 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인 동시에,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는 그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관계 맺는다. 파도처럼, 반걸음씩 가까워졌다가 그만큼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원근 운동, 바로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열린 존재는 정숙자 시인의 시가 닿는 목적지이지 출발점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대부분의 타자에게 닫혀 있다. 우리는 매 순간 해결하는 업무, 시간을 죽이는 대화에 사로잡힌 채 타성적 습관을 반복할 뿐이며, 일상 속에서는 ‘나’를 수습하기조차 어렵다. 열린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정신적 의미의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또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순간 이제 삶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아니게 된다. 삶은 ‘나’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삶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형언 불가능한 실체이자 외부의 풍경으로서 발견된다. 존재 물음은 자동반사적인 삶의 중단이다. 신작시 「실재와 실제」는 그러한 존재 물음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알 수 없는 어느 공간에서, 나는
어둠과 두려움에 새파라니 떨고 있었지
왜 여기 홀로 있으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그 무엇도 모르는 채 온몸 가득 얼음을 채우고 바람 휘감고 갈라지고 있었지.
-「실재와 실제」도입부
왜 ‘나’는 이곳에 있는가. 존재의 의미를 묻기 시작하는 순간 주변은 낯설어진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이곳은 ‘나’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그 순간에 홀로 응답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삶은 어둠이다. 정처가 될 수 없는 삶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결국 모근 것을 홀로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은 얼음을 삼키듯, 바람에 부딪히듯 ‘나’라는 실존적 물음을 받아들인다. 삶의 진실을 추궁한다면 누구에게나 이런 수난은 닥칠 수 있다. 왜 삶을 견뎌야 하는가. 누군가는 멈춰 서기도 하는 존재 물음의 자리에서, 정숙자 시인은 자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유를 발견한다.
그런, 한순간
어떤 이가 내 몸을 감싸 안았어
나는 곧바로 녹아버렸지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용한 그 품속에서
얼음은 다시- 반짝- 숨이 돌았고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았으며 무섭지도 않던 거기서
문득
깨어났을 때
나는 몽땅 벌거숭이였지만
점차 알게 되었지
알 수 없는 어느 은하에서 나를 구해준 그분께서는
이곳 이 마당에서까지
온갖 것 내어주고 덮어주시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시는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셨어
그분이 주신 모든 것 당연히 받을 걸 받은 줄로만 알고 희었네
어느 성운에선가 미아였던 나, 안아주신 그 하나만으로도 하늘이었는데… 이 힘든 세상에 왜 날 낳으셨을까? 그런 신음까지를 얼렸던 적 있지.
-「실재와 실제」나머지 부분
정숙자 시인에게 삶을 견디게 하는 조건은 타자다. 세상에 떨어진 우리를 누군가 품으로 받아내었다는 사건과 옮아오는 온기가 인간에게 삶의 이유가 된다. 세상이라는 막막한 ‘은하’에서 어떤 대가도 없이 온갖 것을 내어준 이가 있다. ‘은하’와 ‘마당’이라는 두 공간의 유비는 다음을 암시한다. 옷의 크기가 몸과 맞아떨어져야 하듯, 공간의 크기는 마음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막막한 ‘은하’ 안에서 인간은 방황할 뿐 거처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마당’, 즉 좁고 내밀한 장소에 머문다. 무엇보다 마당은 부드럽고 따스하고 조용한 ‘품’을 닮아있는 장소다. 따라서 우리는 끝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진정으로 인간의 마음이 거주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타자다. 사람은 사람 안에 거주한다. 그 사실을 돌아볼 때 얼어붙었던 존재는 녹으며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것이나 지고한 것이 아닌, 인간을 향한 겸허한 감사가 그의 시를 이루는 근본적 정조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에게 ‘온갖’ 것을 건넨 타자를 우러러 ‘그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분’을 부모님이나 스승과 같은 이름에 겹쳐볼 수 있다. 대개 그러한 어른들로부터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선사 받는데,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선물은 삶 자체일 것이다. 삶은 건네진다. ‘그분’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나’가 고독하게 남겨질 때도 말이다. 시의 말미에서 무조건적 호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철없던 시절의 죄송함과 다시금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작품에서 홀로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진전을 내재한다
견딘 만큼 비옥해진다
고뇌가 덜리면 사유도 준다
그 둘로 인해 지속적으로 연역/발아하는 깊이와 빛을
질투하는
신은,
회수한다
(진정 고독을 사랑할 무렵)
그렇다고 잃어진 그것을 위조해 가질 순 없다
저쪽, 또는 우연만이 생산/보급하는
그것은
캄캄하지만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지만
결국 깨고 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혹자만의
혹자를 위한
그 두껍디두꺼운 어둠 속
광학,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석벽의 삶
속의 앎
-「꽃병 속의 피」전문
홀로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꽃병 안에서 꽃이 자라듯, 생명은 자기 존재 안에서 세상을 항해 조금씩 자라난다. 생명은 세상을 인내하는 만큼 육체가 비옥해지고, 고뇌하는 만큼 사유가 깊어진다. 다시 말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장하거나 부패하는, 그 자명한 가능성 안에서 휘청거린다는 의미이다. 그 모든 몸부림은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 비추어 보면, 어느 것 하나 왜소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런데 시인은 그 왜소함을 긍정한다. 바로 그러한 왜소함 때문에 생명은 ‘진전’하거나 ‘발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생명은 깊어지고, 빛에 가까워진다. 시인은 ‘깊이’나 ‘빛’처럼 어떤 진리나 선을 향해 나아가거나 반대로 타락할 수 있다는 생명의 가능성을 신이 질투한다고 쓴다. 이때 신이 질투한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의 깊이나 빛이 아니라, 그것들을 갈구하는 존재의 휘청거림일 것이다.
휘청거리는 마음만이 고뇌한다. 고뇌하는 마음만이 피처럼 무겁고 진해진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며 고유한 깊이와 빛을 발견한다.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사건들을 감당한 이후, ‘결국 깨고 보면’ 우리는 자신이 다른 누구에게도 대리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낀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그 고유함이다. 존재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모든 것을 한눈에 보는 신에 비한다면, 한 존재의 ‘광학’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어둠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고유함이다. 한편 ‘광학’이라는 표현처럼, 정숙자 시인에게 존재는 향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상상된다. ‘자기’라는 석벽 안에 한 줌의 빛을 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 조금이라도 전진하고 발아하기 위한 존재가 바로 생명인 셈이다.
신작시 「꽃병 속의 피」는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 수록된 작품인 「균열」과 유사한 상상력을 공유한다. 시 「균열」은 “물이 든 유리병을 공중에 심었다.”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인은 유리병에서 식물적 속도로 자라난 뿌리와 잎새가 공중에 균열을 만들어낸다고 쓴다. 허공 너머의 ‘균열’이란 신과 소통하는 형이상학적 공간을 뜻한다. 즉 “균열은 신과 인간의 시공간 통로/ 간절한 포옹, 비극보다 깊은 밀애”다. 여기서도 우리는 ‘꽃병’의 상상력을 발견하게 된다. 정숙자 시인에게 어떠한 초월을 위한 준비는 일인분의 고독을 씨앗처럼 품는 것으로 시작된다. 존재는 식물적 인내의 속도로 전진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떠한 깊은 포옹이 예시된다.
3. 편재하지 않는 사랑
지금까지 시인의 시에서 긍정되는 것은 열린 존재 또는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다. 혹은 적어도 자기 존재를 사색의 높이만큼이라도 세상에 선사하는 ‘발아’의 상상력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렇다면 반대로 시인의 시선에서 부정적인 것은 더는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 완결성, 자기 존재를 반추하기만 하는 자폐성 따위가 아닐까.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듯 시인은 ‘직각’의 형태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도시적 사물 또는 도시적 공간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직각이 흐르네
직각을 노래하네
직각
직각
직각 한사코 객관적인
도시의 계단들은 경사와 수평, 깊이까지도
하늘 깊숙이 끌고 흐르네
…(중략)…
설계와 이상. 노고와 탄력. 눈물의 범주. 계단은 피와 뼈와 근면의 조직을 요구하네. 인간이 만들지만 결국 신의 소유가 되는, 그리하여 쉽사리 올라설 수도 콧노래 뿌리며 내려설 수도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네.
바로, 똑바로, 직각으로 날아오른 계단은 자신의 DNA를 모두에게 요구하네. 허튼, 무른, 휘청거리는 발목을 수용치 않네. 가로, 세로, 직각으로 눈뜬 모서리마다 부딪히며 흐르는 물소리 콸콸 콸콸콸 노상 울리네.
계단의 승/강은 눈 VS 눈이네. 한 계단 한 계단 한 걸음 한 걸음 한눈파는 눈으로는 안녕불가. 생사의 성패의 지엄한 잣대가 계단 밑 급류에 있네. 너무 익숙히, 너무 가까이, 너무나 친근히 요주의 팻말도 없이.
-「액체계단」부분
시인에게 도시적 공간의 상징은 계단이다. ‘직각’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시인은 기계적 반복을 형태시로 구현한다. 직각은 공간의 독재다. 경사와 수평과 같은 모든 공간을 직각은 계단으로 환원해버린다. 이로써 오직 단 하나의 공간, 수직성을 창조하기 위해 인간과 세계는 조직화한다.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높아질수록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기 어려울뿐더러 더 큰 추락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계단은 급류이기도 하다. 전진할수록 균형 잡는 것은 어려워진다. 무른 자는 수없이 계단의 모서리 위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비명조차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계단은 ‘DNA’를 물려주듯 끝없는 상상의 존재 방식을 모두에게 공유하는 공간이지만, 견고하고 각진 ‘직각’의 질서는 인간을 밀어낼 뿐 교감하는 공간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상승에도 추락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공간을 막막한 절망으로 이해하게 한다.
‘액체계단’은 시적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알레고리로 이해된다. 그것은 욕망할수록 존재 상실의 위기에 직면하는 도시적 삶에 관한 알레고리인 셈이다. 시인은 경고한다. 상승만을 좇는 우리의 삶은 ‘안녕불가’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도시 공간들을 떠올리며 시인의 경고를 이렇게 표현해볼 수도 있다.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는 빌딩들, 마천루와 펜트하우스를 소유한 이후에도 만족하지 않는 욕망들, 설계와 근면에 증독된 사람들은 언젠가는 추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도시의 높이는 결국 ‘신의 소유’로 되돌아가야 할 것을 잠시 탐하는 타락이자 죄다.
코비드-19 & 플라톤/ ‘우한 폐렴’에 이어 ‘코로나-19’, 최근엔 ‘코비드-19’라고도 부른다. 이 모두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을 일컫는 용어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페스트를 연상케 하는 이 급성 호흡기질환은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좀체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전 사회적, 전 지구적 현상인 까닭에 추상을 앞선 절박함으로서의 서사를 「이슬 프로젝트」에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詩)이자 증언인즉,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수도 없고, 모임에서도 개인 간 2m 거리 두기를 실행 중인 현재는 2020년 6월 하순. 일찍이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런 경고를 했다.
“저들은 신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사람을 두 동강이로 쪼개려 하오. 이렇게 하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요. 즉, 그들은 지금보다 약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수가 늘 테니 우리에게 더 유리하게 될 거란 말이요. 그들은 두 다리로 똑바로 서서 걷게 되겠소.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폭한 짓을 하며 시끄럽게 굴면, 나는 이렇게 쪼개기를 다시 하겠소.”
“만일 우리가 신들께 대하여 단아端雅하지 않으면 다시 반쪽으로 쪼개어질 염려가 있어요. 그때에는 우리가 둘로 짜개진 부신符信 조각 모양으로 코 한복판에서 갈려서 묘비에 부조된 반면상半面像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니게 될는지 몰라요. (…) 사실 우리가 이 신과 친구가 되고 잘 사귀면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소년을 발견하며 또 그와 더불어 즐겁게 지내게 될 겁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뤼크시마코스와 나눈 저 대화편에서 “신을 공격”했다는 말의 진의는 “자연을 훼손”했다는 의미로 연결해봄 직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스 쇼의 묘비명 이 겹쳐지기도 한다. 불가역적인 엔트로피의 팽창만을 탓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 자연을 아끼지 않았으니 우리 모두 “신을 공격”한 셈이다.
-「이슬 프로젝트-52」부분
신화적 사고를 빌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지구적 전염병인 ‘코비드-19’는 자연을 훼손한 인간에 대한 징벌이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대화록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이 신에게 받은 형벌을 설명한다. 최초의 인간은 각자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한 쌍으로 결합해 있었다. 즉 남자-남자, 여자-남자, 여자-여자는 둥근 한 몸에 두 개의 얼굴과 네 개의 팔다리로 결합해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만하게 신을 공격한 대가로 ‘분리’의 형벌을 받게 된다. 한 쌍들은 각각 두 사람으로 분리되었고, 이제 인간들은 서로 다시 하나가 되기를 그리워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사랑(에로스)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인 셈이다. 정숙자 시인은 『향연』을 ‘2020년 6월 하순’이라는 시간에 놓아둠으로써, 그리스 시대의 형벌이 현대에도 반복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마스크’는 분리의 형별이다. 인간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고립된 채 서로 그리워한다.
시인이 그리스 신화를 통해 발언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하게 된다. 시인에게 사랑에 관한 진실은 고대와 현대라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그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모든 폭력은 형벌로 되돌아온다. 그 형벌은 무엇인가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고, 그러나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게 되는 존재론적 원리인 사랑이다. 한편 이러한 사랑은 사적 관계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진실의 문제로 격상된다. 미셸 푸코의 표현대로 『향연』은 개인의 환상을 사는 연애술로부터 “주체의 금욕과 진리를 향한 공동의 접근에 관심의 초점이 놓여진 연애술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저술이다. 문명 발전의 욕망을 줄이고 자연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만, 비로소 우리는 고대의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다.
시 「점화전點火栓」에서 시인은 ‘천 년’의 “가지 않는 시간을 지켜본 적 있다”고 고백한다. 마찬가지로 시「이슬 프로젝트-52」에서 시인은 수천 년 동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인간의 사랑,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만 사랑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사랑을 모색해야 한다. 현대에도 유효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하나의 가능성은 시인처럼 『향연』을 참고하여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관계를 모색해보는 것이다. 『향연』에서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차례대로 사랑을 찬미하는 말을 건넨다. 그런데 『향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거나하게 취한 소년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향해 사랑을 고백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30대 정도의 미혼 남성과 사춘기 소년의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 되었기 때문에, 알키비아데스의 고백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고백 속에서 드러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그리스 사회에서도 예외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소년에게 헌신한다. 그에게 철학적 담론을 가르치고, 전쟁터에서 소년의 목숨을 지켜주기도 한다. 그러나 알키바아데스의 육체를 탐하지는 않는다. 그는 소년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나란히-함께 정신적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르는 정신적 사랑이다.
여기서 『향연』에 제시된 정신적 사랑은 단지 상대의 육체를 탐하지 않는다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랑에는 불균형이 깃든다. 연인 중 한 사람의 사랑이 더 클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사랑이 더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지닐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사랑에도 위계는 생겨난다. 항상 여린 마음을 지닌 쪽이 강인한 마음을 지닌 쪽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종속된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했던 여러 소년을 열거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이분이 자신들의 연인이라고 착각했지만 나중에 오히려 이분이 자신들의 연동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일세.” 그리스 동성애적 관계에서 ‘연인(eraste)’은 성인 남성의 지위, ‘연동(eromene)’은 소년의 지위를 뜻한다. 대개 사회적 경험이 많은 연인은 연동보다 우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낮춘다. 그는 소년의 마음으로 소년을 사랑한다. 플라토닉 러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 차라리 상대보다 낮은 위치에 자리하는 것이다.
정숙자 시인이 현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사실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을 다시 살피면, 세상에는 시인의 ‘미지칭대명사’(「인칭 공간」)라고 부르는 타자성이 있다. 사람들에게 증언되지 못한 채, 광장 바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 해마다 갈아치우는 화단처럼, 경제 개발의 수단이 되는 숲처럼, 아예 문명에 의해 수단화된 자연도 있다. 시인은 “돌멩이야 주사 놔 주마”(「대상 x」)라고 말한다. 이때 돌멩이를 돌보며 치유 받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독단이다. 시는 독단을 찌르는 바늘이다. 시의 역할은 황량한 단절을 부드럽게 만드는 힘, 우리의 독단을 중단하고 타자를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자유란 그렇게 분포한다.”(「파생」) 자유는 한 사람에게 편재해서는 안 된다. 인간만의 것도 아니다. 자유는 ‘나’와 모든 존재가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러한 실천 속에서만 우리는 정숙자 시인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가까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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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문집『행복음자리표』, 종려나무, 2014, 10쪽.
2) 「공간시낭독회 회원 소장전에 나온 내 손편지」, 정숙자 시인 블로그 2018년 2월 24일 . http://m.blog.daum.net/bepoem/4341
3) 위의 책, 2014, 14쪽.
4) 더 나아가 고독에 관한 시인의 사유를 하나의 개념적 인물로 종합하자면, 그것은 싯다르타다. 같은 시집에 수록된 작품인 「싯다르타」에서 시인은 “싯다르타, 그는/ 흔들림과 어둠과 홀로를 수용한/ 누적의 용량이었다지”라고 쓴다. 흔들리는 만큼, 고독을 받아들이는 만큼 깨달음은 깊어진다. 이렇듯 싯다르타는 식물의 자세로 수행하는 단독자이고, 꽃병은 구도하는 존재의 상징이다.
5) 미셸 푸코, 문경자-신은영 역, 『성의 역사 2』(개정판). 나남, 2004, 278쪽.
6) 플라톤, 천병관 역,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제2판), 숲, 2017, 371~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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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20-8월호 <이달의 시인>에서
* 정숙자/ 1988년『문학정신』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뿌리 깊은 달』등, 산문집『밝은음자리표』『행복음자리표』 <질마재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 박동억/ 평론가,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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