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수도원
김학중
절벽에 세운 수도원이 있었다
산들과 산들이 이웃하고 있으나
세계의 끝 어딘가 있을 법한
산맥과 산맥을 단절시킨 거대한 암벽에
망루처럼 놓인 수도원
수도원의 이름을 바깥 마을의 사람들은 몰랐기에
가끔씩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버려진 사물들을
조용히 걷어 가는 수도사들과 마주쳤던 사람들이
사물의 수도원이라 불렀다
어떤 이도 수도원이 언제
어떻게
그곳에 세워졌는지,
수도사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가끔 절벽 아래로 세례의 노래만 들려왔다
수도사들은 버려진 사물들을 축복하며
언어로 세례를 주었다
그 예식 속에서 사물은 물질의 은총을 회복하고
사물에 깊이 깃든 빛깔을 회복하였다
그곳에선 사물만이 아니라 수도사들도
사물의 빛깔이 회복시킨 언어들로 세례받았다
기쁨의 기도는 조용히 절벽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기도는 끊어졌고
더는 버려진 사물을 걷어 가는 수도사들이
바깥의 마을로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사물의 구원자들은
갑자기 우리의 곁을 떠났다
수도원은 텅 비었고
절벽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수도원은 어느새 절벽의 일부로 보이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수도원 아래 절벽에 고속도로가 뚫렸다
터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차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터널 위에 수도원이 있다는 걸
터널을 빠르게 지나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터널 속에서 오래전 잊혀진 은총의 노래가
뒤늦은 메아리처럼 도착했지만
사물도 더는 그 노래를 들으며
고유한 빛깔로 깨어나지 않았다.
-전문(p.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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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3-여름(29)호 <poem>에서
* 김학중/ 2009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창세』, 청소년 시집『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소시집『바탕색은 점점 예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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