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기행 2 출판단지
강희근
지혜의 숲에서 바람이 분다
숲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이 왼발 오른발 달려간다
책 속에서 나온 활자들은 활자끼리
지치지 않고 달려간다
책 속에서 나온 모국어는 모국어 소리 다듬으며
달려간다
잘 보면 문화의 편대로 달려가고
역사의 편대로 달려가며 개방의 소리를 낸다
출판의 집은 출판의 집끼리
신간의 집은 신간의 집끼리 새로운 목소리 내며
제 음색 굴리며 골목을 만들고 달려간다
달려가다 힘에 부치는 것들은 지름길
다리를 건너가는데
어떤 것들은 다산교에서 다산의 등에 업혀 달려간다
어떤 것들은 소월교에서 전통의 등에 업혀 달려간다
힘이 더 부치는 것들은 안중근 의사 응칠교를 골라
지혜와 맹의 주머니 탈탈 털며 달려간다
입 안에 돋는 가시, 살살 밀어내며 녹여내며
달려간다
-전문-
▶노령사회 노령시학의 대두와 그 진정성/ 강희근 시인의 신간시집 『파주기행』을 대상으로(발췌) _김미연/ 시인 · 문학평론가
이 시는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지혜의 숲, 활판 역사박물관, 열화당 책 박물관 등이 있는 전체 출판단지를 대상으로 쓴 시다. 시에서 나오는 지점은 지혜의 숲, 출판의 집, 신간의 집, 상징물 다리(다산교, 소월교, 응칠교) 등이다. 1,2,3연은 지혜의 숲을 그렸고 4연은 출판의 집, 신간의 집을 그렸고, 5,6,7연은 상징물 다리를 그렸다. 이 이름만으로도 정보다. 책장의 규모가 높고 넓어서 활자와 책장에 짓눌려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을까. 누군가의 방문기에는 남자 성인의 키 3배 정도로 놓인 서가의 숲을 지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시인은 짓눌리지 않고 "지혜의 숲에서 바람이 분다"고 시작한다. 이어 "숲에서 쏟아져 나온 책들이 왼발 오른발 달려간다"고 쓴다. 읽히기 바라는 책들이 먼저 독자를, 이 나라 지성을 향해 달려간다는 이미지의 활력이 상쾌하다. 활자는 활자끼리 달려가고 모국어는 모국어끼리 달려가고 출판의 집, 신간의 집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골목을 만들며 달려가고, 달려간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필자는 시인의 농익은 시상, 자유로운 이미지에 사로잡히며 "그래, 달려가라 지혜로, 편대로 상징물 다리로 여한없이 달려가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필자는 아직 이 파주를 다녀오지 못했지만 지적 욕구는 이 시 한 편으로 한껏 지성의 하늘을 떠받고 있다. 시에도 때론 신대 잡는, '신들림'의 경지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일찍이 시인을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소통하는 사제司祭이거나 제사장祭司長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제 노령시학의 견문見聞으로 돌아와 시인의 시가 노숙의 공간을 거니는 것이 헨리 소로우의 자연산책에 비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시의 견문에 지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이미지로 김열규 식으로 '노년의 즐거움'으로 젖어드는 것이면 좋겠다는 그 생각에 이른다. (p. 시 325-326/ 론32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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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3-10월(656)호 <이달의 평론> 에서
* 강희근/ 1943년 경남 산청 출생,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 『연기 및 일기』(1971) 등 17권(선집 제외), 저서『우리시 짓는 법』등 수 권
* 김미연/ 2010년『시문학』으로 시, 2015년『월간문학』으로 문학평론 & 2018년『월간문학』으로 시조 부문 등단, 시집『절반의 목요일』, 평론집『문효치 시의 이미지와 서정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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