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장인수 손 장인수 손을 잡고 걷는 사람을 보았다 뒷모습이 쓸쓸했다 손끝부터 이별하누나 파르르 놓는구나 이별하기 위해서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 사람도 있구나! 어머니 임종 때 마지막까지 손을 꼭 잡았던 여자 남자와 그렇게 송별하누나 -전문(p. 68)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장인수/ 200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유리창』『온순한 뿔』『적멸에 앉다』『천방지축 똥꼬발랄』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6
낙타는 아는 듯했다/ 김일태 낙타는 아는 듯했다 김일태 사막을 이해하려면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원치 않는데 속아 산 물건처럼 외롭지 않으려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불어 달려온 시간 되돌려주고 다시 나의 시간으로 무르고 깊은 생각이 났다. 체로 거른 듯한 모랫길을 걸으며 아내가 '이런 사막도 아주 오래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가는 이 길도 예전에는 꽃길이었을 수 있다고 위안하며 모래산 표면이 물결 모양을 짓고 있는 것은 파도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태어나 사막을 벗어나 보지 않아 세상이 온통 사막인 줄로만 알고 모래로 쌓은 길과 집에 길들어 있다가 땅을 향해 자꾸 휘어져 가는 나이에 들어서야 가짜 해와 종이 달과 네온싸인을 별인 양 헤아리며 낙타처럼 걸어..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6
한 겹/ 김영 한 겹 김영 한 겹은 따뜻한 날씨 날씨 위에 홑겹 승복을 두른 라오스 승려들에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한 벌 옷이고 발바닥에 닿는 흙의 촉감도 한 켤레 신발이다 일찍이 치장治粧을 버린 스승을 두었으니 흩날리는 바람 또 부질없다 몇 줄로 삭아 내린 경건이 온몸을 지탱하는 뼈다 길게 줄 맞춰 탁발 중인 한 겹들 두툼한 아침 안개가 상승기류를 타면 한 덩어리의 밥이 바구니 안에 쌓이는 탁발 밥을 구하는 가난한 줄이 꾀죄죄하다 남루도 허기도 자비도 모두 한 겹이어서 따뜻한 곳의 꽃들은 다 한 겹의 꽃잎들로 핀다 사원으로 돌아가는 승려들의 발뒤꿈치에 박힌 한 겹의 고행이 유독 단단하다 그 무심함에 일생을 두었다 -전문(p. 61-62) --------------------- * 『미네르바』 2023-겨울(92..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6
신 성악설/ 함진원 신 성악설 함진원 평생을 선하게 살려고 파도처럼 몸부림한 대가는 가족이 흩어지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힘들다는 것은 사치라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았던 지난날 선한 사람이 바보 되는 세상을 보면서 보증금 떼이고 아까운 젊은이들 바람처럼 사라져가도 누구 하나 관심도 없는 한동안 소식이 없어 자꾸 귀가 기울더니 아버지 죽음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몇 사람에게만 부고를 냈다고 덤덤한 목소리 휘청거렸다 빚쟁이만 안 와도 호상이라고 선한 뒤끝은 한줄기 회한으로 남아 신 성악설을 유산으로 남겨준, 사람이 재산이라고 말했던 선배에게 부고를 전할까 망설였다는 돈과는 거리가 먼 성선설을 잊으려 쓴 눈물을 털어 넣는 밤 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선하게 살면 좋은 날 온다고 돌아서는데 빚이 빛으로 만나지 못하고 살아생전 비만 맞..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6
익산역을 지나며/ 박상천 익산역을 지나며 박상천 지금의 익산역은 예전엔 이리역이었다. 전라도의 남서쪽 목포로 가는 호남선과 남동쪽 여수로 가는 전라선이 갈라지는 곳. 갈라진다기보다는 정확히는 이리역이 전라선의 시발점이었다. 열차가 많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열차 교행을 위해 이리역 정차 시간은 꽤 길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기차가 멈추길 기다렸다가 역 구내에 있던 가락국수집으로 달려가 국수를 한 그릇씩 사 먹곤 했다. 그래서 그때 호남선, 전라선을 타던 사람들에겐 이리역 가락국수에 대한 추억이 있다. 1960년대, 고향 여수에서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갔던 적이 있다. 이리역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서 막 먹으려던 순간, 그날은 웬일인지 역무원이 빨리 타라고 재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릇 채 국수를 들고 기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6
희미한 웃음 이미지/ 최동호 희미한 웃음 이미지 최동호 어둠 속에서 백지 같은 얼굴 하나 희미하게 웃다가 사라진다. 그 희미한 이미지가 오래 머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갑자기 죽거나 요절한 친구가 항상 떠나지 않고 어딘가에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가 불쑥 살아나와 백지처럼 웃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백지는 항상 희미하고 낯선 얼굴로 새로운 고백을 강요한다. 꼬집어 말해야 할 특별한 잘못 없어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을 아직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나서야 그들은 안심한 듯 잘 지내고 살라고 알 수 없는 희미한 백지 같은 웃음을 거두고 사라져가야 불편한 마음도 지울 수 있다 -전문(p. 51) --------------------- * 『미네르바』 2023-겨울(92)호 에서 * 최동호/ 1976년 시..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6
노엘/ 서형국 노엘 서형국 그해 겨울은 납작 엎드려 왔지만 사람들은 겨울을 밟고 연탄재를 뿌리며 오직 캐럴을 부르는데 열중했다 기쁘다 거룩하다 그래서 운다는 사람들이 살이 문드러지는 병을 거두며 키운 돼지를 마을 십자가에 바쳤고 언 땅에서 거둔 시금치가 눈의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는 밤이 소유한 모든 빛을 동원해 녹슨 지붕을 밝혀주길 기도했다 낮은 곳으로 가자 아이야 너도 누군가의 소원이었으니 세상 모든 소원은 이미 누군가 이루었단다 기도는 이런 것이지 기울어 흉물이 된 누각에 올라 자신이 만든 폐허를 내려다보며 당신의 염원을 내 발밑에 두게 해 달라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세상에 몰딩을 씌워 두 편 쪽방에 액자로 걸 수 있게 해 달라고 아이야 지금도 남산공원에는 자신의 몇 번째 계단이 이 도..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4
머리카락 깃발/ 나희덕 머리카락 깃발 나희덕 깃발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모아 깃대에 묶고 그녀들은 외친다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죽이지 말라고 여자라는 이유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목숨은 없다고 2022년 9월 13일 아샤 아미니는 윤리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구타로 삼 일 후에 사망한 그녀는 스물두 살 그녀들은 히잡을 불태우고 함께 걸어간다 머리카락 깃발을 들고 이것은 우리의 이름 이것은 우리의 얼굴 이것은 우리의 심장 머리카락은 얼마나 오래 히잡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자궁을 열고 나온 것이 머리카락이었던 것처럼 가장 슬플 때 바람에 나부끼는 것..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4
밤과 잠과 꿈의 'ㅁ'/ 한용국 밤과 잠과 꿈의 'ㅁ' 한용국 밤과 잠과 꿈은 모두 'ㅁ'을 받침으로 가지고 있다 'ㅁ'이라는 자음과 입 구(口)자가 닮은 것은 우연일까 들어가면 나올 수 있는 게 문이지만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것도 문이라고 불린다 밤의 문과 잠의 문과 꿈의 문을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은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밤과 잠을 묶어 괄호를 칠 수도 있고 잠과 꿈을 묶어 괄호를 칠 수도 있다 두 괄호 사이에는 어딘가 모르는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한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디로 향해야 할까 밤에서 잠으로 잠에서 꿈으로 건너다보면 잠든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ㅁ', 세상의 모든 어둠 'ㅁ', 세상의 모든 가뭄 'ㅁ', 세상의 모든 소름 중얼거리다 보니 마음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마음이라..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4
꽃에 앉아 하늘과 잠시 놀다가는··· / 김륭 꽃에 앉아 하늘과 잠시 놀다가는 돌멩이에게 내려온 배추흰나비와 김륭 돌멩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녀 이야기를 써볼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나는 갓 서른 살이었고 봄날이었습니다. 돌멩이가 돌멩이 바깥으로 나왔다고 썼을 때는 마른 살이었고, 돌멩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멩이 바깥으로 나온 소년을 따라갔을까? 어디쯤 가서 돌멩이 바깥으로 나온 게 소년이 아니라 돌멩이인 줄 알았을까? 나는 소녀였고 소녀를 사랑한 소년이었고 마침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지금 슬픔에 대한 책이 아니라 아프기 좋은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중입니다.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 돌멩이처럼 앉아 있습니다. 잠시 놀다 왔는데, 없는 게 없습니다. 여기 다 있습니다. -전문(p. 180)// 『다층』 2021-봄.. 잡지에서 읽은 시 202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