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전문가
진은영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뿌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거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쁨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나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전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p. 27_ (문학과지성사. 2022)
▶상징과 알레고리 사이, 신화와 역사의 불협화음/ 진은영 시의 미학적 특이성과 구조와 원리(하)(발췌) _오형엽/ 문학평론가
이 시에서 "너"의 "사랑의 마법"으로 인해 "돌멩이의 일종이었"던 "나"에게 "연한 싹이 돋아"나고 "식물의 일종이었"던 "나"에게서 "새빨간 피"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마법의 능력에는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라는 "나"의 확신이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종교적 영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적 마법의 차원에서도 전적인 '믿음'이 기적적인 '능력'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장 이후에 마법은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에서 보이듯 더 활성화되고 확실한 결과를 보장한다. 마법이 가지는 '믿음'과 '능력'의 관계는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라는 구절에 나타나는 "나"와 "너"의 상호 침투적 작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진은영 시의 중요한 특이성을 이루는 무의식적 상호 주체성의 대상으로서 "너"의 속성을 재확인시킨다. 한편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라는 마지막 문장은 진은영이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랑"의 근저에 몰락과 슬픔과 망각이 심연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 도저한 슬픔과 우울의 심연은 진은영의 시가 '예언'이 가능한 '종교적 영성'의 세계에서 이탈한 이후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사랑의 마법"을 구현함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상실과 균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진은영 시의 전체적 향방은 '종교적 영성에서 이탈'-'예언 부재'-'타인과의 연대'-'사랑의 마법'-'근원적 상실과 균열'로 진행된다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p. 시 127/ 론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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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7월(403)호 <기획연재 16/ 2000년대 젊은 시인들> 에서
* 진은영/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오형엽/ 1994년『현대시』신인추천작품상 &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비평집『신체와 문체』『주름과 기억』『환상과 실재』『알레고리와 숭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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