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이찬_"길은 가면 뒤에 있다"(발췌)/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오래전 부서진 누군가가  손짓하며 부르는 듯   4천 미터 해저로 들어간 거다  23만 달러를 내고 잠수정을 타고   심해 관광을 떠날 때  사인을 했다, 쓰레기는 두고 간다고  죽어도, 불구가 돼도, 책임 물을 일 없다고   억만장자 전 재산을 세상에 남겨 두고  몸만 떠난 거다   한동안 잠수를 타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다 아는 척   언제고 동침할 수 있는 죽음이  두근두근 떠다니는  황홀한 심해心海에는   더 이상 부서질 일 없는 난파선이 상주하고 있다     -전문(p. 67)    * 미국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스톡턴 러시의 말. 그가 조종했던 잠수정 '타이탄(난파선..

풀등의 노래/ 이명훈

풀등의 노래     이명훈    열두 살 사내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정선 장터에서 미쳐 춤추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그 말을 가슴 뒤에 세워 놓은 탓에 국졸로 술을 마셔도, 늘 풀매미 같은 슬픔, 지금도 보내지 못하고 있지요. 막노동 끝에 술에 취해 빙판길에 헛발을 디뎌 생과 사의 균형을 헤맬 때도, 강아지풀 무리처럼 흔들리며 웃을 때는   저승사자 앞에서도 실없이 웃었을 광철.  새가 밤으로 들어간 사이 가등 아래 떨어져 누운 매미를 손으로 잡았을 때, 매미의 울음소리가 조장을 끝내는 라마교의 경전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그 불편한 경소리를 붙잡고 밤 깊숙이 서 있는 동안 물이 물을 끌고 흘러가는 것도 봤지요.   이 삼복더위 속에서도..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이난희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만안교      이난희    글을 읽다 멈추고 그대로 집을 나섭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입니다   관악역을 나와 걷다 보니  정교하게 몸을 붙인 홍예수문으로  안온한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립니다   다섯 칸을 계획했던 홍예수문을  일곱 칸으로 개축한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다리 건너편 소나무에  몸을 기댄 바람도 한적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만세萬世에 걸쳐  백성들을 편안便安하게 하는 다리라 이름 지은  200여 년 전 임금의 염원이 장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군주의 애민은 염려를 감당하고  염려는 방도를 생각하였으므로   하천을 건너려고 옷을 걷어 올리지 않..

희우루/ 이난희

희우루     이난희    폭염 속에  소나기 쏟아집니다  요즈음 일어나는 잦은 현상입니다   비를 피해 성정각 누마루 아래 들었습니다  빗소리에 고요는 더 지경을 넓힙니다   왕세자의 공부방은 열려 있습니다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의 마음을 짐작 못 하듯  훗날 어떻게 기록될지 그도 짐작 못 했겠지요   돌계단을 딛고 빗물이 내려가는데  그냥 찾아온 생각들   요즘엔 기쁜 소식이 정말 뜸하지 뭡니까   비가 내려서 반갑고  비가 그쳐서 반가운 마음이 교차합니다   시시콜콜  소소한   뭐 그런 반가웠던 소식들을 불러 모아  누각 동쪽으로 향합니다   喜雨樓   가뭄 끝에 내린 비의 기쁨을  함께하고파 이름 지은  왕의 마음이  춤을 추듯 편액에 새겨 있습니다   희우루     희우루       발음하는..

신뢰/ 윤석산(尹錫山)

신뢰     윤석산尹錫山    파도가 아무리 무서운 기세로 몰려와도  모래들은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희디흰 몸뚱일 끌어안고  파도를 견디며, 안간힘을 쓴다.   비록 작디작은 몸통이지만  수만, 수억의 몸통을 서로가 서로를  껴안는 신뢰만 있다면   아무리 사납게 밀려드는 파도라도  그만 나뒹굴며 허연 거품으로  널브러지고 마는구나.  이내 모래알 사이 온몸 스미어 숨죽이고  마는구나.      -전문(p. 57)   -------------------  * 『계간파란』 2024-가을(34)호 에서  * 윤석산尹錫山/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로 등단, 시집『절개지』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밤의 방향과 구슬 놀이     이제니    내가 알던 산은 열리지 않는 산이었다  내가 알던 구슬도 마찬가지여서 좀처럼 굴러가는 법이 없었다   굴러가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일까  우주 공간의 곡률을 면밀히 따져 묻듯이  은거 중인 노인의 얼굴로 너는 물었다   곡면이 아닌 평면 위에서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는 의지가 작동할 때에만  열리고 보이는 머나먼 산이 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군요  빛의 신호에 의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먼지 구슬 같군요   너의 얼굴은 고대의 파피루스와도 같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누구도 아무도 너의 내면을 읽어 내지 못했으므로  너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먼지 구슬의 방향을 따라   굴러감 그것은 던져짐이었고  던져짐 그것은 버려짐이었고  버려..

친구 외 1편/ 박순원

친구 외 1편       박순원    국민학교 4학년 때 조용하고 조그맣고 깡마르고 빡빡머리에 꼬지지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들끼리 몇 명 머리를 맞대고 조용조용 킥킥거리며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다가와 그 친구에게 아버지 뭐 하시냐고 친구는 그냥 웃기만 했다 농담처럼 묻던 선생님이 재차 묻고 정색을 하면서 물었는데도 웃기만 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묻자 웃지도 않았다 나중에는 두드려 패면서 물었다 맞으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두드려 패다가 선생님의 분이 안 풀려 식식거리고 있는데 들릴각 말락 입술만 달싹달싹 똥구르마 끌어요      -전문(p. 13)     --------------     깅아지   내가 깅아지라고 하면 사람들은 언뜻 내가 'ㅏ'발음을 못 하는 줄 알았다가 가운데 '아..

랄/ 박순원

랄     박순원    발랄의 랄과 지랄의 랄이  서로 만나서 지랄의 랄이   반갑다 우리는 같은 랄이야   발랄의 랄이 발끈한다   랄이라고 다 같은 랄이 아냐  나는 剌이야 潑剌 분별 좀 해 분별  내 옆구리에 칼 안 보여?  조선 시대 같았으면 넌 죽었어   시대가 바뀌었어 네가 剌인 줄  누가 아냐? 다 랄이지 이제는  그냥 다 랄이야   네 눈엔 안 보이지만 내 속엔  아직 칼 들었어 조심해   다 녹슬어서 들지도 않는  칼 가지고 폼 잡지 마 너만 다쳐  그냥 발랄하게 살아   나는 누가 뭐래도 剌이야  당분간 발랄한 척하고 있지만  언젠가 칼을 쓸 날이 올 거야 그땐  네 관절 마디마디가 온전치  못할 거야 온전치  못할 거야 조심해   그래 그럼 나야 껍데기나 속이나  뒤집고 흔들어 봐야 ..

박판식_이 적은 보물 주머니/ 繡(수)의 秘密(비밀) : 한용운

繡수의 秘密비밀     한용운    나는 당신의옷을 다지어노앗슴니다  심의도지코 도포도지코 자리옷도지엇슴니다  지치지아니한것은 적은주머니에 수놋는것뿐임니다   그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만히무덧슴니다   짓다가노아두고 짓다가노아두고한 까닭임니다  다른사람들은 나의바느질솜씨가 업는줄로 알지마는 그러한비밀은 나밧게는 아는 사람이 업슴니다  나는 마음이 압흐고쓰린때에 주머니에 수를노흐랴면 나의마음은 수놋는금실을따러서 바늘구녕으로 드러가고 주머니속에서 맑은노래가 나와서 나의마음이됨니다  그러고 아즉 이세상에는 그주머니에널만한 무슨보물이 업슴니다  이적은주머니는 지키시려서 지치못하는것이 아니라 지코십허서 다지치안흔것임니다    -전문-    * 블로그註:  '때' , '까', '따,의 옛 훈민정음체 쌍자음을 쓰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