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김밝은_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시를···집(부분)/ 스트로마톨라이트 : 이건청

스트로마톨라이트      이건청    인천시 서청도 부남 서편 해안  25억 년 전 지층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화석이 있다.  박테리아, 스트로마톨라이트  원시 생명으로 변이되어가던 때의  섬유질 남조류藍藻類로  물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하는데  천둥, 번개 몇 억 전압 방전 에너지 속에서  생명유전자를 처음으로 복제하기도 했다는데,   이 화석의 채집자는  군집한 박테리아가 분비한 점액질이  바위에 흔적을 남긴 것이라 적고 있다.*   세균과 섬유식물 중간쯤의 저 것  바위에 거뭇거뭇 번져 있는 저 것  25억 년, 원생대  스트로마톨라이트가 뿜어낸 분비물이 굳은 화석   물질 속에서  생명의 시작을 풀어내는  그리운 점액질,  남조류가 남조류를 껴안은 채  거뭇거뭇 화석으로 굳은  스트로마톨라..

김밝은_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이 함께인 집(부분)/ 어이! 달 : 신달자

어이! 달     신달자    어떻게 여길 알았니?  북촌에서 수서에서  함께 손 잡고 걸었던 시절 지나고  소식 없이 여기 경기도 심곡동으로 숨었는데  어찌 알고 깊은 골 산그늘로 찾아오다니······    아무개 남자보다 네가 더 세심하구나  눈웃음 슬쩍 옆구리에 찔러 넣던  신사보다 네가 더 치밀하구나  늦은 밤 환한 얼굴로 이 인능산 발밑을 찾아오다니······    하긴 북촌 골목길에서 우리 속을 털었지  누구에게도 닫았던 마음을 열었지  내 등을 문지르며 달래던 벗이여   오늘은 잠시라도 하늘 터를 벗어나  내 식탁에서 아껴 둔 와인 한 잔 나누게  가장 아끼는 안주를 아낌없이 내놓겠네  마음 꽃 한 다발로 빈 의자를 채워주길 바라네  어이! 달!     -전문,『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조은설_시시다반사(詩詩茶飯事)를 노래하다(전문)/ 다반사 : 서상만

다반사          1 考      서상만    새벽 눈 뜨자마자 밤새 저질러놓은 詩抄를 다시 훑어보는 일, 뭐 推敲란 말 너무 거창하고 우선 시의 詩的 동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시어는 새로운지 너무 관념적 시어는 없는지 너무 단출해서 반편인지 어조는 낡지 않았는지 횡설수설 장광설로 길어빠진 시가 아닌지 산문시에도 운율은 살려야 등등을 살피고 아, 이거 영 아니다 싶으면 즉시 날려버리고, 그래도 좀 가져갈 구석이 있으면 고이 숙성시킨 후 다시 꺼내본다 이 나이토록 이렇게 시시 다반사다    -전문-   ▣ 시시다반사詩詩多飯事를 노래하다(전문)_ 조은설/ 시인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일면식이 없어도, 글 속에 오롯이 담긴 생각과 사상만으로도 그의 사람됨을 추론해 낼 여지가 다분하기..

이유정_강렬한 이미지, 긴 여운(전문)/ 뻐꾸기 : 문효치

뻐꾸기       -시집 『헤이, 막걸리』(미네르바, 2023. 12.)      문효치    남의 집에서 자란 몸  이름을 잊을까 봐  뻐꾸기는 한 봄내 제 이름을 불러 댄다  어미가 지어 준 이름  피처럼 토해 내  이산 저 산 나무마다 걸어놓고  목청 돋구어 읽고 또 읽고     -전문-   ▣ 강렬한 이미지, 긴 여운(전문)_이유정/ 시인  이 시는 강렬한 이미지와 감정을 잘 전달하고 있다. 또한 단어 선택과 이미지 사용이 신중하여 각 단어에 무게가 실려 있다. 시의 리듬을 고려한 흐름과 반복적인 요소들도 독자의 주의를 끈다. 짧은 시의 특성을 잘 살렸기 때문에 시적 이미지가 매우 강하게 기억되고 긴 여운을 남긴다.  화자는 뻐꾸기의 울음을 들으며 자기 내면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남의 집에서..

차성환_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발췌)/ 꽃님이라 부르던 이름 : 정빈

꽃님이라 부르던 이름      정빈    어젯밤 꿈속에서  소복이 쌓인 눈 위에 꽃을 그렸어요   베란다 화분에 맺힌 멍울 하나  밤사이 꽃으로 피어나서  이별의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대는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새벽을 깨우던 바람은  눈물 한 번 닦아주지 않았던 방관자   보이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듯  들리지는 않지만 귓가를 맴도는   꽃님이라 불리던 이름   오늘도  고백으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전하지 못한 말, 들리나요   마지막 눈이 녹기 전에 누군가  어젯밤 그 꽃을 보셨다면  꼭 전해 주세요   수취인은 울 엄마예요     -전문-   ▶ 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 꽃이었던 시절/   고명재, 정빈 시인의 신작시에 붙여서(발췌)_차성환/ 시인 · ..

차성환_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발췌)/ 나 안아줘 스님 : 고명재

나 안아줘 스님      고명재    사진 속에는 완전히 깡마른 스님이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껴안고 있다 육체가 산산조각 나버린 이다 젊었으나 아팠고 병약했지만 그때 그 목소리는 산보다 파랬다 두 사람 다 정면을 보고 있다 사진 밖까지 한때의 눈빛이 닿는다 아이의 어깨는 어른의 양팔에 가려져 있고 편안한 듯 따스하게 감싸져 있다 어떠한 경우든 어른은 아이보다 체구가 크다 사랑은 그런 규모와 골격을 뜻한다    -전문(p. 230)   ▶ 기름과 돌봄의 능력, 그리고 꽃이었던 시절/   고명재, 정빈 시인의 신작시에 붙여서(발췌)_차성환/ 시인 · 문학평론가  '나'는 "완전히 깡마른 스님이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히고 껴안고 있"는 "사진" 을 바라본다. 추측컨대 "사진 속"의 "아이"는 시인 자신일 것..

염선옥_해체의 상상력과 그러데이션의 언어(발췌)/ 실어증 : 강준철

실어증      강준철  사물들이 실어증에 걸렸다.책들은 모두 책장 안에 서서 잠을 자고, 방바닥에 쌓아놓은 잡지들은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한다. 기타와 카세트테이프와 청소기는 식물인간이 되어 누웠다. 여름 이후 목 디스크에 걸린 선풍기가 눈을 흘기고 있고, 종이로 얼굴이 막힌 코로나 마스크들은 몸을 움츠리고 눈치만 살핀다.우리말 사랑을 외치던 가로막 두 개가 몹시 지친 듯 책장에 기대고 서 있다. 문지文知와 창비創批의 그 많은 시집들은 빈틈없이 몸을 붙이고 어깨를 꽉 끼고 있지만 아무 말이 없다. 학위기념패, 상패, 공로패, 감사패들은 상자처럼 쌓여 부끄러운 듯 헌 봉투 밑에 숨어 있고, 상장과 임명장과 표창장들도 장작처럼 포개져 불 탈 날을 기다린다. 피를 뽑아 엮은 논문들과 저작물도 장식품이 되어..

전해수_결별(訣別)의 역설(발췌)/ 훗날의 꿈 : 박완호

훗날의 꿈      박완호    지나간 훗날을 더는 꿈꾸지 않으리  한 손가락 굽은 여자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지 않으리  그녀의 순한 눈망울을 닮거나 물려받지 않으리  오월 햇살같이 다사로운,  엄마라는 발음의  나보다 어려지는 한 사람을 품지 않으리  슬픔의,  아무 데서나 엇갈리는 걸음을 재촉하거나  꿈꾸지 못하는 밤을 책처럼 쌓아두지 않으리  문밖 살구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자국 없는 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리  제대로 늙어보지도 못한 아버지  깜깜한 물소리 끼고 산등성이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  서러운 꿈의 궤적을 비껴가는  어떤 내일도 돌이키지 않으리        -전문-   ▶결별訣別의 '역사 읽기(발췌)_전해수/ 문학평론가  시 「훗날의 꿈」은 결별 이전을 꿈꿔보..

얼굴/ 이온겸

얼굴     이온겸    감정보고서를 적어야 한다   깊은 물 속에 새겨진 이름을 적어야 할까  웃음이 피어났던 눈빛을 적어야 할까  무음으로 통하는 감정의 교차로에서 새벽 4시를 알리고 있다    알람에 놀란 해는  제한 높이 걸려 숨 막히는 턱걸이를 한다   거울 속에 앉아 있던 여자는  시간을 품어 깊게 새겨진 길을 그리고   고단해 보이는 선을  끊임없이 잡고 올라가는 손 밑으로  더위에 지친 고양이는 졸고 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해  쏟아지는 아침을 쓸어담기엔 좁았다     -전문(p. 115)   ---------------------- * 『미네르바』 2024  여름(94)호 에서 * 이온겸/ 2023년『미네르바』로 등단

곤충호텔/ 윤옥란

곤충호텔      윤옥란    습한 계절  먹구름과 천둥소리가 지나가면  뒷산 산벚나무 열매들이 비바람에 떨어진다   이때부터 낡고 오래된 집의 동거가 시작된다   새벽 알람시계가  깊은 잠을 흔들어 깨울 때  재빠르게 침을 놓고 날아가는 모기 한 마리  귓가에 맴돌던 윙윙 소리  잠을 내쫓는 알람보다 매섭다   잠에서 깨면 이불 속에서 무언가 휙 빠져나갈 때도 있다  문단속을 아무리 잘 했어도 언제 들어왔는지  빗자루 찾는 사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수십 개의 발을 지닌 지네 한 마리와  긴 더듬이로 얼굴을 스치고 간 바퀴벌레는 한통속    벽이나 바닥으로 돌아다니는 돈벌레 뒤를 이어  순식간에 부엌으로 날아든 꽃매미가 날개를 접고 있다   우리 집 안팎이 숲이다    낡은 집을 호텔이라고 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