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이야기- 원형/ 유희경

이야기     원형     유희경    할머니는 타래에서 실을 뽑으며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나는 그 노래를 기억해본다. 그러면 할머니는 지긋이 바라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실. 슬슬 풀려가는 실. 친친 감기는 실. 무언가 허술해졌고 그만큼 불룩해지고 할머니의 노래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옮겨갈 뿐. 그 얇고 가는 사이. 아가.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창밖에는 늙은 나무가 있고 그것은 아슬하게 서 있다. 가을이 되면 저 위태로운 각도의 잎들을 모두 벗고 중심의 방향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쯤. 그렇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그런 노래였나. 그랬구나. 머리를 만져주는.     -전문-   ▶갱신과 반복, ..

송현지_쌓이(지 않)는 반복들(발췌)/ 리을 : 구현우

리을     구현우    벽화마을을 일인一人이 배회하는데  무슨 사연은 없다   영혼을 잃은 월요일도  친밀했던 이의 기일도  아니고   집에 돌아갈 기분이 아닐 따름이다   일인一人은 독백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잉어가 그려진 계단에서  내려가야 한다······     오선지 같은 전선에 찢어지는 새털구름  새는 보이지 않고 새소리는 들린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일인一人은   사람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을 본 적은 있다  사람 같지 않다고 느꼈을 뿐   담의 끝에서 잘린 그림이 다음 담의 처음과 연결되어 있다   일인一人은 독백한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는 아니었는데    벽화마을은 다방면으로 열려 있고 그러므로 출구는 따로 없다  지금이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일인一人은    자신만의 ..

송현지_쌓이(지 않)는 반복들(발췌)/ 공원의 좋은 풍경 : 정재율

공원의 좋은 풍경      정재율    새가 날아간다   사람들은 종종 연못에 동전을 넣고 기도를 드린다  아주 짧게   중얼거리는 사람들 옆으로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가 있고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어른도 있다   이상하다 분명 이곳에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하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람  그 옆으로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가고   안전모를 착용했을 때 사망할 확률은 3배나 감소된다고 한다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 새는 연간 팔백 마리라고  그것을 글래스 킬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면 잠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가만히  손바닥 위로 올라온 빛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쥐었다가  다시 펴보았다가   반복하는 동안   이곳에선 함부로 모이를 주면 안 된다고  누군가가 공원의 좋은 풍..

송현지_쌓이(지 않)는 반복들(발췌)/ 내 마음의 돌 : 김참

내 마음의 돌      김참    토요일 아침, 강변 돌밭에서 돌 하나 들고 보다가 내려놓는다. 다시 하나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강변엔 돌이 많다. 하얀 선 들어간 돌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구멍 숭숭 뚫린 돌도 들었다 내려놓는다. 흰 물새 한 마리 고요히 떠 있는 푸른 강과 돌 찾는 내가 돌아다니는 뜨거운 강변 돌밭. 서로 다른 세계 같다. 강변에 돌이 많지만 내가 찾는 돌은 보이지 않는다. 9월의 태양은 여전히 뜨거워서 돌밭도 아직 뜨겁다.   섬을 한 바퀴 돌았는데 돌밭이 보이지 않는다. 섬을 빠져나오는데 절벽 아래 보이는 돌밭. 물놀이하는 아이들과 낚시꾼 두엇 보이지만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잡목을 헤치며 비탈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가니 마침내 나타나는 넓은 돌밭. 크고 작은 돌들을 살피며 천천..

고봉준_상실의 시, 그리움의 언어(발췌)/ 봄의 건축가 : 송연숙

2023, 제9회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 시집_송연숙 『봄의 건축가』> 에서     봄의 건축가      송연숙    소쩍새가 망치를 두드려  후동리 밤하늘에 구멍을 내고 있어요  소쩍소쩍 두드린 자리마다  노랗게 별이 쏟아지는 걸 보니  아마 그리움을 건축하는 중인가 봐요   노랗게 황달을 앓으며  어머닌 별처럼 익어가셨어요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몰라요  아버지가 잘못 밟아 터져버린 먹구름 솔기  등으로 그 빗줄기를 묵묵히 막아내시던 어머니   아가, 세상사를 조심하거라  아 어머니, 당신의 구부린 등 안쪽은  언제나 뜨뜻한 방이었고, 옷이었고, 밥상이었어요  조심조심 구름을 살피며 발걸음 옮기다 보니  어느새 저도 희끗한 정년의 머리카락이 보여요   잘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흰..

이영춘_ 글은 곧 그 사람이다(발췌)/ 접속사를 고르다 : 송연숙

접속사를 고르다      송연숙    사람은 사람이 접속사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  나무들은 초록을 근거로 설명하고  물은 물소리를 저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것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긴 시간 동안 사람을 이어왔다   풀로 붙인 편지 봉투처럼  한 번 쓰인 접속사는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나뭇잎처럼 피어나고  물소리처럼 흘러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긴 설명의 끝에는  언제나 수긍하는 말들이 아름다웠고  짧은 설명에는 명쾌한 말들이   다음, 그 다음을 이어갔다   그러나, 반전의 문장은 늘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무릎을 치는 감탄사가 등장하는가 하면  뒤통수를 치는 절망의 표정들이 들어있기도 하다  한 권의 책에는 무수한   접속사들로 페이지가 묶이고  일생을 설명하는 사용설명서같이..

김익균_시작하는 시인들을 위하여(발췌)/ 최후 : 나지환

최후     나지환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엔 얇은 물감 같았던 노을이 마침내 십여 분 남짓 타오르는 순간 중에서도 가장 붉고 아름답게 확산하는 순간을 말하지요. 그것은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게 하고, 옥상에 늘어진 수국이 빛을 붙잡게 합니다.   한편 나는 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을 마지막으로 노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아직 남아 빌딩의 유리벽을 감싸는 환한 자국을 말합니다. 그것은 물웅덩이가 밤의 검은 물이 되기 전까지 품는 밝은 그림자이고, 구름을 지우며 구름의 윤곽을 그리는 빛의 미세함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합니다. 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마땅히 찾아와야 할 짙은 코발트색 어둠이 몰려오지 않습니다. 먼 물로 돌아가서 쉬어야 할 거위들이 자전거도로..

푸코와 열애 중/ 한소운

푸코와 열애 중      한소운    정오가 되어도 밤중같이 캄캄하다  운무에 싸인 산이 지워지고 있는 중이다  펜티멘토 안개로 덧칠된 그림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통! 통! 통!  베란다 샷시에 부딪치는 빗소리  마당 가의 놋 세숫대야에 떨어지던  유년의 그 비를 닮았다   대책 없이 빠져드는 비요일  이런 날은 음악을 들어도  산책을 해도 쓸쓸함이 따라온다  방에 앉아 있어도 귀는 그쪽으로 쏠리고   귀를 잘라야 하나   마음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터버리자  망설이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가는  내 안의 나여!  피 끓던 연애 시절 밥때를 잊고, 잠을 잊었던  그때처럼 그에게로 빠져든다  거실 안방 작은방 가는 곳마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  안경 너머의 번뜩이는 눈..

내 안의 개를 죽이는 법/ 최형심

내 안의 개를 죽이는 법      최형심    (사랑하지 않는 개를 본 적도 없고 울고 있는 물고기를 본 적도 없다.)   문을 열면 한밤중입니다. 하얀 소금 사원에선 가벼운 옷을 입고 떠날 수 있습니다. 공휴일의 로맨스는 뜨겁지 않았다고 사막여우의 밤을 빌립니다. 누군가 저물녘의 기원에 대해 묻는다면 수요일의 법원처럼 마음이 붐빌 것입니다.   (푸른 물 위에 침묵을 포개놓으며)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려 봅니다. 은사시나무의 안부를 묻고 싶어집니다. 그를 기다리던 좁은 계단에선 물고기로 흘러갑니다. 성하盛夏의 한낮, 윤슬 위로 기관차 소리 지나가고   (마침내 고요가 된 개들이 서로를 마주보았을까.)   식물 모종에 이식한 오후 여섯 시는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백 년을 건너와 새로운 백 년을 기다..

세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조창환

세상은 다시 평온해졌다      조창환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가는 며칠 사이  여인은 잠깐 눈 한 번 떴다 감았을 뿐  의식이 없었다,  석션으로 가래를 뽑아낼 때도 반응이 없었다  고통스러운지 견딜만한지 알 수 없었다,   소변 줄로 오줌 뽑아내고, 산소호흡기로 숨 쉬게 하니  목숨 붙어있긴 하지만, 이 상태를 살았다 할 순 없었다  119 불러 구급차 타고 와 며칠 밤새운 남편과   소식 듣고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자식들이  무거운 얼굴로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흰 가운 주머니에서 흰 종이쪽지를 꺼낸 의사는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에 사인한 뜻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존엄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도 자식들도 고개 끄덕이고, 싸늘한 손 잡고  가쁜 숨 쉬는 얼굴 오래 바라보았다  흰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