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산상꽃밭 천상별밭▼/ 김영산

산상꽃밭 천상별밭▼         망우리 공동묘지      김영산    사는데 이유가 없지만  죽는데 이유가 많다   나는 죽어서 묻혔노라,  살아 있는데 죽음보다 큰 고통이 온다면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힌 것이다   소나무 가지마다 올가미가 보이고  "시마왕이 아니라면 나를 무덤에 데리고 올 수 없어!"  그도 아니라면, 나쁜 시가 벌이는 놀이인지 몰라? 나쁜 시는 있느냐   모두 꿈이길 바라지만  누군가 내 시를 무덤에 가두고  봉합하여   봉분을 만들어 꽃밭을 가꾼다,  일찍이 나도 죽은 그녀를 위해  산상꽃밭 천상별밭의 시를 써서   애인의 묘비에 깨알 글씨로 쓴 적이 있다,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돌이켜보니  『하얀 별』이란 시집이 파비가 되기 전에 시가 이랬다   내 시는 장시가 아니라 ..

박은정_가시가 박힌 채로 걸어 다니는 춤(발췌)/ 악력 : 박은정

악력     박은정    꽃병의 물이 썩어간다 나는 누웠다 창밖에선 날카로운 감탄사들이 들려온다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퍼지고 개들은 더위 속에서 조금씩 미쳐간다 눈을 감고 생각한다 이 폭염 아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 노래는 한 곡 반복된다 주먹을 쥐면 모든 것들이 빠져나간다, 유년의 침울한 내가 옆에 눕는다 넌 변한 게 없구나 내 오른뺨을 찰싹 때리는 소리, 나의 슬픔은 맞아도 싸다 눈물이 귓속으로 떨어지는 동안 이 방은 안전한 어둠이다 인중에 땀이 맺힌다 눈물이 땀과 뒤섞인다 이 물질은 이제 무엇으로 연동되나 나는 걷고 있었다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과 함께 나는 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희미하게 방 안을 맴도는 기억들이 있다 나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며 세계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등..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  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  사람을 뒤덮고  소원을 뒤덮고  울분을 뒤덮고  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  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  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  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  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  병을 고치는 사람들.  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  엄마, 하고 부르면  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  아주 오래전  돌로 하늘을 내리치면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  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  울 곳이 없어  돌 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전문, (시집『돌이 천둥이다』, 2023, 아시아)    * 中/ (p. 273-274)    -  좌담: 서윤후 · 이지아..

홍성희_소란騷亂(발췌)/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 이설빈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이설빈    창문에 눈송이가 붙어 있다  입을 벌리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 눈도 눈송이를 들여다본다  두 눈에서 맥박이 뛰고  번갈아 발소리가 녹아든다   내 눈은 나보다 오래 깨어  복도를 서성인다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   밤새 얼굴을 감싼 손에  햇빛보다 부드럽고 환한  진흙이 묻어나온다 진실을 털어놓을 때마다  복도의 문이 열린다 지나쳐온 의문과 지나치게 가까운 질문이  한몸으로 나를 호흡한다   녹아내릴 것 같아  그렇다고 창문을 열면  눈이 달라붙겠지 온몸에 발소리가 번지겠지  복도는 많은 문을 가졌다 그보다 더 많은 창문을   계속 닫고 있을래?   복도에 불이 들어온다  언제까지 눈을 뭉칠래?   *   불이 나..

순간/ 이태관

순간     이태관    그대가 내게 한아름의  사랑이란 이름에 꽃을 던져 주었을 때  난 들길을 걷고 있었네   그래, 짧지 않은 삶에  간장 고추장 이런 된장까지 다 버무려  한 끼의 식사  한 잔의 커피   하룻밤은 언제나 누추한  순간이란 걸 알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만남은 허점투성이의 약속일뿐인데   꽃이 터져 오르는 순간   난 그대에게  눈길만 주었을 뿐이네   바람은 불어가더군  꽃은 지더군   지는 꽃들이 거름 된다는 걸  훗날, 알게 되었네    -전문(p. 212-213)  ---------------------------  * 『현대시』 2024-2월(410)호 中  * 이태관/ 1990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저리도 붉..

김언_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나 모두가···(발췌)/ 못이 자라는 숲 : 신동옥

못이 자라는 숲     신동옥    낫과 부삽을 들고  정원에서 시를 썼지 백일홍과 덩굴장미가 뒤엉키고  라일락 향을 품은 사과가 쏟아졌다  웃자란 꽃 덤불에 누웠지만 향기에는 라임이 없어서  벌 나비는 깜빡이는 커서를 선회하고  구겨버린 종이 같은 하늘이 손끝에 휘감겨 왔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 속으로 난 푸른 길을 따라  떠나는 사람을 쫓아서 길을 나섰다   그다음 거리의 시를 썼어 애초에  다듬어 놓은 정원이 오래갈 거라 믿지는 않았다  비가 그친 틈에 화분을 파헤쳐 보면  망가진 장난감과 깨진 술병투성이였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꿈속이었다  거리의 끝에는 광장이 펼쳐졌고 거기서는  저마다 자기 플롯을 이끌고 온 사람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라고 불러온 노..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죽음을 기다리는 집▼      김명리    우산을 받아도 온몸이 젖는 세찬 빗줄기를 뚫고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도착했다   강둑 따라 늘어선 화장터에는 죽은 몸을 씻기고 꽃으로 장식하는 장례의식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강한 빗줄기들은 때로는 밧줄처럼 삼세三世의 인연을 동여매고 때로는 유리대공처럼 깨어져 허공에 흩어지기도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아직은 살아 있는 자들이 속속 도착하는 집, 화장터 입구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숨을 거두기 무섭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 육신을 태워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이 그 집을 세웠으리라   잠시 빗줄기의 눈금이 촘촘해졌던가 생과 멸이 화염에 휩싸이고 빗줄기마다 화엄세상이 진동한다   바그마티 강물 위 꽃잎처럼 떠 있는 몇 마리 소들은 인..

김경인_시인하다(발췌)/ 서정 : 김경인

서정      김경인    바닷마을에 갔었네  사랑하려고   겨울 한껏 낮아진   겸손한 지붕들을 돌아 나오다   보았네   멀리서  푸른 하늘 아래  순한 슬픔처럼 나부끼는  희디흰 빨래들을   나는 천천히 다가갔지  수백 오징어들이 줄줄이 꿰어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네   오장육부가 능숙하게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인    -전문-   ♣ 시인하다(발췌)_김경인/ 시인  요즘의 내게 시는 이런 것이다. "저 멀리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참혹뿐"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비극이 우세한 세계에서, "도려내진 채 전시되는 투명한 내부"를 옮기는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듯이 침묵하다가, 문득 바라보고 증언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는 시를..

정미주_한숨이 바람이 되는 당신의 천국(발췌)/ 스무고개 : 신동옥

스무고개      신동옥    모두 떠나는 집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  집이 없어서 헤매는 게 아니라 헤매다 보니  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진 집   당신이 대문에 가위표를 그리자  마법처럼 지워진 집 이 빠진 우체통에  주인 없는 편지가 쌓이고 문짝이 뒤틀리고  유리에 금이 가고   보풀 날리는 낮은 처마를 돌아간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여기서 살기 지겨웠나  여기서 죽기 두려웠나 모두 모두  묻어두고 떠나는 집   덩굴장미 남천 줄기를 흔드는 눈보라에  도깨비들 춤추는 집 무말랭이 콩자반 거름에  짠 내 나는 구름이 뭉개고 앉은   마당 구석 웃자란 사과나무   홀로 언젠가 제 둥치에 잠들었을  당신을 기억하는 듯 버려진  화단을 점령한 꽃들은 밤에도  달빛을 끌어모으는데   나무에 등을 대고 ..

황유지_파롤의 빈손이 떨려올 때(발췌)/ 들쥐와 낙엽 : 김건영

들쥐와 낙엽      김건영    신자유주의의 모기가 방안을 떠돌고 있다 겨울에도 모기가 있다 자유란 얼마나 가려운 것인지 집이 부풀고 있다 굴러다니는 것들이 바깥에 있다 밟으면 부서지거나 터지는 것들 안에서 바깥으로, 다시 바깥으로부터 안으로의 검열이 있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들이지 않은 것들이 들어온다 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검역 속에서 막아야 하는 것들 속에서 내가, 내가 자주 집으로 돌아온다 쌀에도 벌레가 있다 이 집은 안전하니 한 마리쯤 더 키웠으면 좋겠군 그 은행잎들은 어디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모든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