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무명시인/ 함명춘

무명시인     함명춘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려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유난히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한 장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김춘식_가볍고 가벼워서 세상의 그 누구도···(발췌)/ 나무늘보 : 함명춘

나무늘보      함명춘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을 짊어지고 가기에  저토록 느리게 기어오르는 걸까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으니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그건 고뇌일 거다  그래, 지상의 고뇌란 고뇌는 모두 끌어모아  등 위에 짊어지고  나무 꼭대기에 올려 놓으려는 거다  다시는 지상의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아예 큰 구름 위에  붙들어 매어 두기 위해 기어오르는 거다     -전문-   ▶가볍고 가벼워서 세상의 그 누구도 읽을 수 있는(발췌)_김춘식/ 문학평론가   '나무늘보'의 형상에서 시인의 자기 초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개인적 견해는 아닐 것이다. '고뇌'를 끌어모아 지상의 그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 나무늘보의 느린 행보가 구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

달빛감옥/ 백연숙

달빛감옥     백연숙    언제 들어왔는지  차고 푸른 달이 거실까지  창살 자국을 찍어 놓았다   달은 언제나 젖은 발이었다   물 마시려고 나오자  뒷걸음질 치는 발자국들   가느다란 발목을 어루만져 본다   어두울수록 달의 발자국 움푹 파이고  바닥의 물기 마를 새 없는지  달빛은 고양이 자세로 한 발짝 두 발짝 우아한데   환하게 불 켜진 거실에서  물 마시다 말고 스위치를 내린다  저편 어둠 속에서 보이는,   베란다 창살 감옥에 묶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 창문에 맺히는 여자    -전문 (시집『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 2024. 파란)    * 中 (p. 266-267)    -  좌담: 오은경 · 정재훈(사회) · 전호석     ----------------------..

이철주_신록의 밀어와 범람하는 폐허들(발췌)/ 남이 될 수 있는 우리▼ : 이담하

남이 될 수 있는 우리▼      이담하    그믐달과 초승달 안에서 집합  혼자가 아니라 우리,  남인데 우리, 우리 할 때마다  우리 사이에 땀이 흐르는 관계  남이라서 뜨거워지죠   친애하는 애무는 무엇이든 곡진합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남, 그래서  남이 될 수 있는 우리는 우리가 되기 위해 남을 사랑하죠  모를수록 뜨거워질 확률은 매우 높죠   남이면서 남이 아닌 우리  우리이면서 우리가 아닌 남  서로의 반대편에서  반쪽이라는 관계 설정으로 잉태와 출산과 유혈이 흥건하죠   우리의 남, 남과 우리  주름이 생길 수도, 무음으로 깨질 수도  태평양이 들어설 수 있어서 아주 좋아요   남이라서 가까워지는 남의 남  우리라서 멀어지는 우리의 우리   나는 당시에 남이고  당신은 나의 남이라서 우..

정과리_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1 (발췌)/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 : 전봉건

다시 마카로니 웨스턴1)      전봉건(1928-1988, 60세)     누가  하모니카를 부는데  두레박 줄은 끊어지기 위해서 있고  손은 짓이겨지기 위해서 있고  눈은 감겨지기 위해서 있다.   그곳에서는  누가 하모니카를 부는데  피를 뒤집어쓰고 죽은 저녁노을이  까마귀도 가지 않는 서쪽 낮은 하늘에  팽개쳐져 있다.      -전문-   ▶ 죽음에 맞선 순수의 형태들 1 (발췌)/ 전봉건 : 죽음을 횡으로 캐다_ 정과리/ 문학평론가   전봉건의 "투명한 표현"을 어디서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까?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연은 짧지 않다. 우선 시인이 현실을 묘사하는 양상을 보자.           *  이(위) 시의 이미지가 너무 극단적이어서인지 부적절한 해석이 붙곤 했..

이지아_김정환이라는 시의 국가(발췌)/ 막간: 히페리온, 조금 덜 사소한 참회 : 김정환

中     막간: 히페리온, 조금 덜 사소한 참회      김정환    너무나 행방불명이라서 죽음조차  아마추어 행방불명인  생이 있다.  죽음이 억울하다.  왜냐면 너무나 행방불명이라서  생조차 아마추어 행방불명인  죽음은 없다.  정체성이 불확실한 문제라면  정체성의 불확실을 정체성이 드러내지 않고  정체성의 불확실이 정체성의 불확실로 드러나지 않는다.  정체성의 불확실이 정체성의 불확실로 드러난다.  그런 식으로도 불확실을 입증하거나 입증 받는 대신  정체가 풍성해진다.  신이 원래 없고, 없으므로 신이었지만  신성神性이 내용과 형식과 그 둘의 조화에서   모두 신을 능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비일비재가 능가를 무마하는 어디쯤에서  신의 모양이 정해지고 신이 신인 모양에 비해 아직  괴기스럽고 그..

날씨의 후예들▼/ 김인숙

날씨의 후예들▼      김인숙    지구엔 날씨와 같은 종류로  분류되는 존재들이 있다  개구리들은 봄으이 선두를 자처하지만  울음은 비를 전조前兆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잡은 가축의 내장을 보고  그해 날씨를 예측하는 풍습이 있다  그건 먹이사슬로 이어진  연결고리들 때문일 것인데  갑자기 내리던 비가 뚝 그치듯  내가 다가가면 요란하게 울던 개구리울음들이  일시에 고요해진다  봄밤의 침묵,  나는 울음의 천적이 된 듯 조신操身해진다   개구리들은  비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 할머니는 비의 전조를  밤새 끙끙 앓곤 했다  빨랫줄 빨래들과 뚜껑 열린 장독들과의  불화를 겪는 빗방울들은  할머니의 온 관절을 돌아다니며  동그란 파문을 깨트리곤 했다   몇 마지기의 요란한 신음呻吟들 ..

아버지의 봄날/ 김혁분

아버지의 봄날     김혁분    시린 봄날이었다  요양병원 침대 위 아버지는 벚나무를 베고 누워 있었다   침대 위로 흩어진 벚꽃잎   귀 기울여 묻지 않아도  여명 속 코끝을 스치는 온기가 좋았다고 파도처럼 가래가 들썩여도 꽃 보러 가자던 나들이처럼 죽자고 좋았다고  한숨 옆에 누워 있어도 좋았다고 꽃비 흩날리는 추락이라 해도 살아 좋았다고,  이명처럼 맴도는   밭은기침 소리가 멈췄다   떨어지기 위해 매달리는 꽃잎처럼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  입관 사이 꽃잎이 날렸다   밥은 먹고 다녀라 한 귀로 흘려버린 말이 들썩였다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토닥이며 꽃잎이 흩날렸다   무심한 아버지 걸음 따라  벚꽃길이 길게 열리고 있었다   때늦은 저녁이 오고 있었다     -전문(p. 48-49)    ..

돌의 재난사▼/ 이재훈

돌의 재난사▼      이재훈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요? 그저 과거일 뿐, 왕궁의 기억도 걸인의 기억도.   땅에 있기 전에는 모두 엄마의 팔에 안겼죠. 돼지우리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당신은 허영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에요.   마구간으로 가는 길을 아시나요? 당신은 궁륭에 있었어요. 길에서 태어나 채찍에 몸이 패였죠. 누구보다 먼저 종소리를 들었죠.   장대한 땅. 끝없는 바다. 모든 공포 속으로 가보았죠. 세상에는 거인이 너무 많아요.   언어가 오염되고 있어요. 착한 언어를 쓰시나요. 솔직해지세요. 모든 통곡에는 이유가 있어요.   시기. 불만. 짜증. 정욕. 고통의 언어를 숨기지 마세요. 위로하고 축복하고 싶으면 가장 나은 것으로 해주세요. 위대한 말은 꿈을 나눠 갖는 것이에요.  ..

아오리스트/ 김안

아오리스트      김안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검은 창밖이 갑자기 환해진다.  둥근 빛.  세차게 움직이며 뒤흔드는 빛.  밤의 들판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머리들.  형상 없는 얼굴을 가린 아마포 펄럭이는 소리들.  찢는 소리들.  나뭇가지 부러지는,  사방에서 나무 쓰러지는 소리들.   한때 그는 성난 악기였습니다  검은 나무와 가느다란 쇠줄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후렴구만 기억하는 노래처럼  결국 기억되는 것은 죄와 치욕의 목록이겠지만,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피와 먼지로 엉겨 붙어 있어도,  시간과 바람이 미세한 금을 서서히 전진시키더라도,  그보다 더 세차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지,  이것은 여전히 정직한 거울,  소리들, 빛들이.   그의 책은 금서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