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정끝별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귓속뼈를 이루는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는 가장 작고 가벼운 뼈들이 가장 나중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귓속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의 가장 작은 뼈들을 내 작은 목소리로 어루만지며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전문(p. 80)    ※ 제목 끝에 [▼] 표시가 된 작품은 시인들이 직접 뽑은 1~2년 내의 근작대표시입니다. 이 작품은 현대시 작품상 후보작으로 검토됩니다.    ---------------------------  * 『현대시』..

입동/ 박성우

입동     박성우    상강에 날아왔던 물오리들이 물결을 당겨 펴며 물그물을 쳤다   텃밭에서 몸집을 키우던 배추 두 포기가 뿌랭이만 남기고 갔다   포플러 가지 끝에 올라 흔들흔들 울던 까치가 겅중겅중 뛰었다   고춧대 뽑아낸 자리로 들어가 기지개를 켜는 겨울초가 푸르렀다   무시래기 삶는다던 팽나무집 할머니가 마당가 화덕에 불을 넣고   물오리같이, 배추 뿌랭이같이, 까치 꽁지깃같이, 겨울초같이 서 있었다     -전문(p. 23)   ------------------------  * 『현대시』 2023-12월(408)호 에서  * 박성우/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환절기/ 이심훈

환절기      이심훈    스쳐 지나는 바람의 표정도 수시로 변해  흘러가고 나면 되짚어 올 수 없는 감정   한 번 건너면 오지 못하는 환절기   강변 마른 갈대숲 살얼음으로 엉킨  옷자락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 꽃샘 길   쇠기러기들 일순 날아올라 먼 길 떠난다.    평생 걸리고도 남을 가짓수를 품은 감기  견디는 것 외 치료법이 없는 불치의 감성   막힌 인후가 풀리고 기침이 터져야 봄이다.   지난 계절 서운했던 일들일랑 거둬들이고  혹여 서운하게 했던 일들이나 헤아려 보며   마음 비운 그 언저리에 가랑잎 모여든다.   겨우내 언 삭신 풀려 흐르는 여울목 버들개지  풍향계 방향 바뀌는 쪽으로 귀 기울이는 곡선   미련 없이 돌아서 갈 줄 알아야 철새다.   -전문, 시집 『뿌리의 행방』에서, ..

오대혁_구술의 시를 통한 죽음의 관조(발췌)/ 나무 : 박찬호

나무     박찬호    물어본다고 아는 것도 아니었고  안다고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스레 한마디 물어본다  마지막 가을볕은 따가웠고  제법 바람이 차가운 오후에도  당신의 손은 따뜻했다  힐끗 보면 소나무 같고  자세히 보면 잣나무 같은  저 나무에 대해  저 나무의 떨어진 열매에 대해  물으면서도  대답하면서도  우리 서로는 답을 알고 있지만  단답형의 답이 두려워  다시 물음으로 대답했다  뭐지?  글쎄?  마음속 가문비나무는  그렇게 익명의 나무로  그 가을을 지나고 있었다      -전문-    ▶ 구술의 시를 통한 죽음의 관조(발췌)_ 오대혁/ 시인 · 문화비평  가문비나무는 소나무나 잣나무와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사전의 표현으로는 더더욱 구분하기 쉽지 않다. 어원을..

한 사람/ 이서란

한 사람      이서란    책 한 권을 읽는데  족히 십 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겉표지에 난 수많은 칼자국  제목의 글씨는 상처로 얼룩져  어떤 글자였는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버릴 수 없는 애정 어린 책     서로에게 스며들기 위해 뒤척이던 시절  서로를 몰라 마구 찔러대기만 했지  언제부터였을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펴 들고   다가서면 심장을 찌르는 통증  알았습니다. 우리는 혈통이 다른 족속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경청하는  방식으로  해진 책 한 권을 건너갑니다     -전문(p. 89)  ---------------* 군산시인포럼 제4집 『바다의 메일』 에서/ 2024. 6. 5. 펴냄  * 이서란/ 2021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별숲에 들다』

파리목숨/ 조병태

파리목숨      조병태    허기진 파리 한 마리  주위를 살피면서 식탁 위에 내려앉는다.   숨을 죽이고 살그머니 일어나  파리채를 가져왔다.   정조준하고 내리치려는 순간  자신의 죽음을 눈치챘는지, 서둘러  공손한 태도로 소곳이 앉아  두 손 모아 싹싹 빌며  목숨을 구걸한다.   측은지심*을 가지고  생사를 신중하게 결정하려는 순간  고개를 두어 번 갸우뚱거리더니  죽음의 활주로를 가볍에 이륙한다.   구명의 애원을  자비심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감사하며 떠나는가?   나에게도  결정적인 운명의  절박한 순간이 닥쳐온다면  얌전히 무릎 꿇고  두 손 싹싹 빌어 볼 거나.    -전문(p. 192-193)     * 측은지심: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

코카서스의 밤/ 박소원

코카서스의 밤      박소원    나의 숙소는 넓은 창문을 열면 설산을 향해 있다  자정 무렵 어둠 속 달을 따라  가파른 산등성이에 시선을 올려두고  나는 희디흰 눈雪이 쌓인 추위를 가슴에 올려둔다  내 룸메이트는 이상하게 생각할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눈사람,  아직도 나는 추위에 약한 두 눈이 큰 겁 많은 소녀다  분명 우리는  어느 기차역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높은 난간에 서서 오른쪽 발을 허공으로 떨어뜨리던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 하나,  녹아가며 추락하는 눈 코 입 희미한 미소  전쟁의 밤을 뚫고,  달빛이 내 방으로 여름 눈雪을 짊어지고 오고 있다     -전문(p. 150) -------------* 『미래시학』 2024-여름(49)호 에서 * 박소원..

아름다운 나라/ 김창범

아름다운 나라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기리며      김창범    해방된 줄 알았더니  남북으로 찢겨져 싸운 지 80년  핏줄끼리 죽이고 또 죽여 원수 된 나라  이 나라 세운 대통령도 내쫓은 나라  어, 그럴수록 더 그리운 나라   이 땅에는 언제나 해방이 오려나,  언제쯤 통일이 오고 평화가 오려는가  철따라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 쏟아지니  압록강은 언제나 풀릴런가   동포여, 두려워 말고 달려가자  내 나라는 어딘가, 남의 땅에서 쓸쓸히  마지막 밤을 지새운 이승만을 만나러 가자  이 나라를 보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가자   이 나라 주권을 찾아주고  백성에게 자유를 안겨준 대통령,  이승만을 이젠 우리가 지키러 가자  한성감옥이 무너져라 외치던 그 정신  하늘이 가르쳐준 독립정신을 ..

청동거울/ 강명수

청동거울       전주 국립 박물관에서      강명수    지리산 능선을 휘돌아  완주, 장수, 임실, 남원의  기운 역사  소용돌이 늪을 지나서   수많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유리관 속에  청동 알이 앉아 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의 힘으로  백성의 안위를 기원했을까?   천지인을 담아 놓은 가야의 숨결   서 있는 산이 무릎 꿇고  알집 속에 가둬둔 왕조의  압축 풀기를 기다린다     -전문(p. 127) -------------* 『미래시학』 2024-여름(49)호 에서 * 강명수/ 201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법성포 블루스』

완창/ 마경덕

中       완창      마경덕    산굽이를 돌아온 계곡들  갈래갈래 물길이 만나 철철철 음역을 높인다  서로서로 등 떠밀며 웅덩이에 주저앉은  물의 엉덩이를 끌고 내려간다   저 아래 절창이 있다  물의 비명이 자욱한 해안폭포가 있다   번지점프를 앞두고 밀어붙이는 투명한 채찍들, 등짝을 후리는 소리에 물의 걸음이 빨라졌다   개울에서 꼼질거리던 물의 애벌레들  하얗게 질려 폭포 끝에서 넘어지고 처박히더니,   일제히 우회를 하고 주저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굽이굽이 긴 노래  완창이다   피를 토하며 득음을 한 명창도 있다     -전문(p. 89)  -------------* 『미래시학』 2024-여름(49)호 에서 * 마경덕/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신발론』『글러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