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탭댄스/ 한정원

中       탭댄스     한정원    모스 부호다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다  글자들이 튀어 오르듯  암호처럼 빠르고 짧게, 세게, 약하게  빗방울이 되어 코끝을 부딪친다  쇠붙이를 박은 언어들은 ㄸ, ㅌ, ㅎ, ㄲ,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공중돌기하다가  흑백의 파편을 뿌린다  추위를 견디려고 폴짝폴짝 뛰는 추운 나라 사람처럼   허공은 터졌다가 다시 봉합된다  캐스터네츠의 파열음  착지하는 순간,  바닥을 치는 소리 듣는다  언제나 그렇듯   타악기처럼 받아줄 울음의 공명이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광야를 질주한다, 고백한다, 담을 넘는다  넘어진다, 깨진다, 호명한다   모스 부호의 비밀을 벗어난 스팽크, 셔플  발과 구두 사이  발가락 끝과 발뒤꿈치 사이  한 생애가 엇박자로 이어진다   울..

그녀의 주름치마는 누가 접었을까/ 문봉선

그녀의 주름치마는 누가 접었을까      문봉선    새도우를 바르고 새처럼 새쁜새쁜  마지막 마스카라로 마무리는 굿  새처럼 새쁜새쁜 나의 애마를 부르렴  충무로로 가자   말을 타듯 천방지축 날뛰지 말고  엉덩이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땐 품위를 지키렴  사쁜시쁜 연미복은 날아갈 듯 가벼워  탈의실 같은 건 없어도 좋아  아직 야성이 넘치니까  간이테이블에 걸터앉아   커버력 좋은 햇발 한 줌  주름진 얼굴에 비비면  각선미가 돋보이는 청춘이 더욱 빛나거든  금빛 망사 스타킹에 어울리는  주름치마는 분홍이어도 괜찮아  과거와 현재, 추억을 갈아 넣어  펼쳐질 미래는 핑크빛으로 빛날 테니까   조명이 찬란한 충무로 파랑새 극장  그 꼭대기로 데려다 줘  십자가 위  2막 8장 구겨진 보름달을 펼쳐보인다  ..

와디/ 홍은택

와디     홍은택    사막에도 강이 흐른다  우기에만 넘쳐흐르는 강 소노라 사막에서 일 년을 살았다 선인장 희고 노란 꽃이 피고 오래도록 해가 졌다 달 없는 밤 별똥별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 몸에 가시별로 박혔다  붉은 먼지바람으로 떠돌던 나바호족 영혼이 허파 꽈리 깊숙이 스며들었다. 뭔가  기둥선인장 물관을 타고 바닥 드러낸 강이 무감하게 흘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상형문자 새겨진 암벽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은 것도 납작 엎드린 흙집들 우는 소리가 들린 것도 이미 사막이 된 내 몸속 와디가 마르고 흐르기를 되풀이하는 것도     -전문(p. 248)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홍은택/ 경기도 광주 출생, 1999년『시안』으로 등..

도원기/ 한소운

도원기      한소운    무릉리와 도원리의 초대를 받았다   도화를 보려고 달려간 도천*  꽃숭어리 절반은 무너졌고  절반은 가파르게 흔들리는데  꼭 나를 닮았다  독백처럼 웅얼거리는 바람소리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자리   그대라고 쓰면  눈물이 마침표를 찍는다   첫새벽 이슬의 문장으로 편지를 쓴다  편지가 닿기도 전에 아침이 오고  밤새 머리맡을 떠돌던 별자리도  글썽이다 돌아간 텅 빈 하늘   복숭아꽃 강둑을 걸어 봐도  별빛 내려앉던 마당가를 서성여도  당신이 오지 않으면 꽃이 핀들 무슨 소용  무릉도원은 어디에도 없다     -전문(p. 241-242)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도천길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한소운/ ..

잠자리 시에스타/ 최금진

잠자리 시에스타      최금진    잠자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누가 이 외투 속에 갇힌 몸을 열어줄 것인가  꽃들은 혀를 내밀고 헐떡인다  오후는 제 무게만으로 무거워지고  그는 공중에 버려져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살 것인가, 뛰어내릴 것인가, 깨어나지 않도록  잠 속에 날개를 결박하고  죄수처럼 웅크릴 것인가  잠자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동안  순식간에 잠이 왔다 가고  잠은 어느 것에도 기대하는 바가 없다     -전문(p. 235)   -------------------- * 『시현실』 2024-여름(96)호 에서 * 최금진/ 2001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 시인상, 시집 『새들의 역사』 외

식탁/ 최선

식탁      최선    식탁에게는 누가 밥을 차려줄까   새벽 5시에 가장을 불러 앉히고  나에게는 모닝커피 한잔을 건넨다   숟가락과 밥그릇 부딪는 소리로 허기를 달래는 식탁  그 많은 음식은 제몫이 아니다   노모가 절반을 흘린 밥도  금세 행주가 훔쳐 달아난다   사각의 모서리로 버티는 식탁  가끔 옆구리를 찌르는 것은  허기진 속 알아달라며 내부 비밀을 발설하는  그의 습관성 투정이다   가끔 시장기를 참지못해  발밑에 숨긴 몇 개의 밥알들이  사금파리처럼 날카롭게 발바닥을 찌르기도 한다   귀퉁이에 민들레 한 송이  꽂아 주면  머리핀처럼 반짝이며 근사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한 때 친척집에 얹혀 살 때가 있었다  때를 놓친 귀가길에는  대문 안쪽에서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발뒤꿈치..

그때 나 살던 삼양교회 골목길에서··· / 채상우

그때 나 살던 삼양교회 골목길에서 참죽나무가 하루 종일 열심으로 하던 일      채상우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내내 있고  바람 불면 바람이 불어 가는 쪽으로 잠깐 손길을 내밀다 있고  발치에 민들레 피면 홀씨가 흩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고  날이면 날마다 계란 장수가 꼬맹이가 아저씨가 중학생이 폐지 줍는 할머니가 바람 빠진 구루마가 골목 너머 아주아주 안 보일 때까지 내다보고 있고  문득 둘이 와서 꼭 껴안고 있으면 그러나 보다 있고  누가 혼자 와서 울면 다 울 때까지 한참 우두커니 있고  밤이 되면 밤처럼 꾸역꾸역 거기 있던 대로 그대로 있고   그렇게 있는 일   그냥 그렇게 있는 일    -전문(p. 229)  -------------------- * 『시현실』 2024-여름(96)호 ..

나의 멱살에게/ 정호승

나의 멱살에게      정호승    이제는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아도  멱살잡이하지 말고 그대로 끌려가라  도둑으로 몰려 멱살 잡혔을 때처럼  끌려가지 않으려고 앙버티지 말고  침이 튀고 단추가 떨어지고 구두 한 짝이 벗겨져도  멱살 잡힌 채로 웃으면서 끌려가라  그동안 느닷없이 멱살 잡히는 일만큼  서러운 일 또 없었으나  이리저리 멱살 잡힌 채 끌려 다니느라  눈물 또한 많았으나  이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필요는 없다   결국 시간에게  저 늙은 시간에게  오밤중에 멱살 잡혀 끌려갈 줄은 나도 몰랐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도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끌려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가 고깃국에 저녁을 차려놓고  다정히 기다리고 있지 않겠느냐     -전문(p. 227..

천변에 버려진 배춧잎에 관한/ 정병근

천변에 버려진 배춧잎에 관한      정병근    천변 산책로 밑 외진 물가에 배춧잎 서너 장이 버려져 있다.   자전거 짐받이에 배추 한 단을 싣고 온 남자는 자전거를 도로 옆에 세우고 배추를 들고 이곳으로 내려와 겉잎을 뜯어서 버리고 앞 배추를 들고 다시 올라가서 전전거에 싣고 집으로 간다고? 만일 이러려면 배추 한 단을 안고 하필 여기에 와서? 대체 어떤 마음일까? 버려진 배춧잎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담배 한 대 피우기에 손색없는, 비닐과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낡은 배구공이 미스터리처럼 불쑥 발견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타다만 장작을 발로 툭툭 차다가 오줌을 갈긴들 보는 이도 지적할 이도 없을 이런 곳에 버려진 배춧잎을 설명하기가 영 쉽지 않아서.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벚나무에게서 온 편지/ 이교헌

벚나무에게서 온 편지      이교헌    어느 날에 이곳에 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지 몰랐습니다  밑동이 점점 굵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뿌리는 땅 위에서 서로 얽혀 기어 다니듯 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겨냈습니다  때로는 뜨거운 태양이 성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추위를 이겨내느라 고생이  심했습니다  가끔 병약한 이웃들이 사라지는 걸 보았습니다  노을이 걸린 어느 날 저녁은 근사했습니다  더욱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주 좋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피해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롯이 서 있었습니다  당신을 부르며 서 있었습니다  바람으로 흩어지기 전까지     -전문(p. 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