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1/ 이영광 유령 1 이영광 이것은 소름끼치는 그림자, 그림자처럼 홀쭉한 몸 유령은 도처에 있다 당신의 퇴근길 또는 귀갓길 택시가 안 잡히는 종로2가에서 무교동에서 당신이 휴대폰을 쥐고 어딘가로 혼자 고함칠 때, 너무도 많은 이유 때문에 마침내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질 때 그것은 당신 곁을 지나간다 희망을..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4
날/ 이미산 날 이미산 게으르게 누워있던 칼이 내리꽂힌다, 도마 위의 고등어를 향해 배고픈 매의 눈알처럼 번쩍이며 피가 튄다 붉은 내장이 끌려나온다 도마 위에서 피 맛을 즐기는 저것은 칼의 혀 칼의 살 속으로 저며 드는 칼의 날 고등어를 자르고 고등어 속 바다를 자르고 바다 속 어둠을 자르고 어둠의 실핏..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2
꽃송이 꽃송이/ 이미산 꽃송이 꽃송이 이미산 내 방 벽지에 꽃송이 가득하네 잠시도 나를 떠난 적 없는 눈빛이네 여태 저들과 눈 한 번 맞추지 않았네 꿈속으로 초대한 적도 없네 손 내밀어 꽃송이 어루만지네 꽃송이들 흔들리며 내 앞에 쏟아지네 달려와 이불이 되네 꽃이 만발한 이불을 덮고 나는 여행을 떠나네 지난겨울..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12
당산나무/ 손한옥 당산나무 손한옥 오빠의 젊음을 삶의 한 막 속으로 접은 뒷장에 나의 시 한 편 오빠의 등 뒤에 꽃등불로 밝힌다 늘 푸른 나무로 서 있는 큰오빠는 내 고향의 당산나무 세 아름 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면장님도 온몸을 오므리고 발자국 소리를 죽였지만 서울 사는 큰오빠가 바퀴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7
가릉빈가/ 손한옥 가릉빈가 손한옥 어머니를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오니 창 옆에 한 손으로 마지막 씻어놓고 간 신발이 있다 삭아서 더 말랑한 흰 고무신 한 켤레, 햇빛 속에서 얇은 양 날개가 팔랑거리고 있다 감자꽃이 피고 살구가 떨어지는 텃밭을 날던 어머니의 얇은 날개다 한 손으로 얼굴을 씻고 한 손으로 머리를..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7
미래의 유적지를 보다/ 김추인 미래의 유적지를 보다 김추인 관절이 아프다 누가 내 뼈마디에 쿵쿵 곡괭이질을 해 대는지 구멍들 파 대는지 몸이 욱신욱신 말을 걸어오고 있다 저 사진을 보시죠- 열 손가락뼈 관절 마디마디가 잘 조형된 설치물처럼 단아하다 오른손 장지 두 번째 관절을 지적하며 담당의는 새삼스런 일은 아니란 듯..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5
모래시계/ 김추인 모래시계 김추인 한 생이 다른 생을 밀고 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추락하면서 날아오르면서 거기 착지할 바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밀리어 끝까지 가보다 어느 지점에선가는 뛰어내려야 하는 모래의 시간이 있습니다 거꾸로 뒤집히면서 비로소 다시 뛰어내릴 수 있는 힘이 축적된다는 거 앞서거니 뒤..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5
담배꽁초/ 이명 담배꽁초 이 명 나는 언제나 축 처져있다. 실패가 인생의 이유라면 나는 아주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 담배같이 살고 있다. 내 머리는 벌겋게 타고 있다. 누군가 내 다리를 씹고 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타고 있는 머리를 만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려 하지만 누군가 물고 있어 그러지도 못하는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4
거미다/ 이 명 거미다 이명 거미다. 거미가 기어간다. 소리도 내지 않고 장판을 가로지른다. 거미다. 거미가 기어간다. 거미줄을 친다. 천장으로 올라가 거미줄을 친다. 나는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다. 반투명한 거미줄 끝에 붙어 가만히 있다. 거미다. 거미가 다가온다. 거미가 나를 칭칭 동여맨다. 움직이지 못한다. .. 시집에서 읽은 시 2010.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