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169

카르마 외 1편/ 김안

카르마 외 1편      김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제 여기는 낯선 방이다. 이 방이 내게 어떤 꿈을 꾸게 할까. 난 자리가 티가 난다는 말은, 부재란 윤리와 면피를 꿰매 붙인 자리라는 뜻 같구나. 침상 위에는 밤보다 긴 이불. 아버지가 누웠던 자리에는 병이 여전히 남아 홀로 앓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익숙한 것은, 저 헐떡이는 병뿐이니 나는 스스럼없이 가서 그 위로 눕는다.   오래 앓다 햇빛 아래 선다. 단단하고 검은 돌에 부딪히는 부드럽고 하얀 물처럼 11월이 내 겨드랑이를 휘감고 명치가 저리다. 하얀 꽃잎이 중얼거리며 떨어진다. 전날 밤, 천사가 나의 방문을 지나갔는데 그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챌까 두려웠다. 그때 밤이 재빠른 손길로 나의 숨을 막았다. 순간, 내 몸속에서 ..

기일/ 김안

기일      김안    11월의 늦은 오후, 멍한 상태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건 내일도 내내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기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게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물으시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는 오랜만에 뵌 어머니 모습에 얼떨떨하면서도 반가웠다. 철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강아지 같은 마음이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 이름이 뭐였죠? 무슨 소리니? 강아지라니. 내가 그 강아지가 된 마음이라니까, 오랜만에 엄마를 보니. 냉장고에서 하얗고 서늘한 빛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어두고서 내게로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강아지 ..

자라 외 1편/ 박미향

자라 외 1편     박미향    컨테이너 박스,  바람으로 바른 벽지를 두르고  그는 누워 있다   오십여 년  다리 하나로 서서 나머지 다리를 견인하는 동안  그의 목은 없어졌다   종일 구두를 닦았다  구두가 밥을 먹여 주었다  검은 밥을 먹었다   밤마다 검은 별이 떴다  욱신거리는 저녁을 담배연기로 칭칭 감아 묶으며  물집이 난 왼쪽 엉덩이를 오른쪽이 달랬다   웅크린 목을 꺼내 구두 밑창을 확 뜯어버리고 싶은 날은  보고 싶은 첫사랑도 지웠다  오른쪽 손금에 굳은 길이 하나 더 생겼다   만신창이의 저녁,  서릿발 돋은 윗목에 벌레가 웅크리고 있다  추위가 지나가면 저 녀석 벌떡 일어나  목을 길게 빼고 빠르게 걸어가겠다   한때 미치도록 갖고 싶었던 다리를  여섯 개씩이나 움직이며     -..

깁스/ 박미향

깁스     박미향    한쪽 발목에 푸른 붕대를 감고  여름을 건너뛰지 못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수없이 걸었던 걸음을 모아  차곡차곡 쌓아놓고  풀벌레 소리를 뚜껑으로 얹습니다   거대한 지구 위에 반 평 남짓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오랜 소욕들이 항복하며 뼈를 잇고 있습니다   더러는 창밖으로 빠져나간 마음을 불러 앉히는데  그때마다 체증으로 등을 두드립니다   달래기 어려운 것은 돌아다니던 마음입니다  내려놓은 것은 결국 남아 있는 마음입니다   베란다에 괭이밥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밤과 추위를 만나 자주 고갤 숙이던 날들을  잘 건넜습니다   지키지 못한 기도를 다시 옮겨 적으며  뼈를 붙이고 있는 밤   푸른 붕대 속의 발목이 가렵기 시작합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깁스」..

의식 외 1편/ 이만식

의식 외 1편     이만식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길가의 풀 한 포기에 의식이 있었다면  그리도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지는 않았겠지.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가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풀이 지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겠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동물원에 갇혀있는 사자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아무리 정교한 포위망을 구축해놓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사람이 지배자가 되기 전에 사자가 제압했겠지.  사자의 강력한 힘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

세 개의 포도/ 이만식

세 개의 포도      이만식    1  포도가 있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2  개가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개는 포도를 먹는다.   3  개의 주인, 내가 본다.  식탁 위의 포도를 본다.  개가 포도를 먹는다.  포도가 맛있게 보인다.  포도를 먹는다.   식탁 위에 있는 포도와  개와 내가 먹는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세 개의 포도"는 세 개의 시선과 연결된다. 첫 번째 포도는 무응시無凝視의 시선, 즉 아무도 바라본 자가 없는 포도, 두 번째 포도는 개가 바라본 포도, 세 번째 포도는 '내'가 바라본 포도이다. 개와 '나'의 시선에 포착된 포도는 그것을 바라본 시선들에 의해 해석된 포도이다. 그것은 닫힌 의미..

질경이꽃 외 2편/ 강문출

질경이꽃 외 2편      강문출    대학병원 심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를 봤습니다 오랜만에 가까이 앉아서 봤습니다 어릴 적 신작로 길섶에서 본 달구지 바퀴에 짓밟히고 뭇사람들 발자국에 짓밟혀 상처투성이인 질경이 같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던 그를 길섶 안쪽으로 옮겨주고 싶었습니다만 내 힘이 모자라고 그의 삶이 벅차서 호미나 만지막만지작하다 말았습니다 내가 시들어 가던 질경이 잎사귀에 손을 대자 잠시 생기가 도는데 그 작은 떨림이 천상으로 오르려는 마지막 날갯짓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울음보다 더 슬픈 웃음을 지었습니다 난생처음 대엿새 쉬었다 가겠거니 하고 병원에 들렀다가 온몸이 망가진 줄도 모르고 대엿새 만에 떠날 줄도 모르고 메스가 제 몸을 헤집었는데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웃었습니다 푸르게 웃기 위..

거미백합/ 강문출

거미백합      강문출    처음 봤을 때 포켓몬의 식스테일이 떠올랐어요   여섯 개의 희고 긴 꽃잎에 혼이 나갔거든요   저 꽃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는 증거처럼요   벌 · 나비 윙윙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여름날 뭉게구름을 탄 기분이었으니까요   꼬리가 여섯 자란 구미호를 생각했어요   자태가 이국적이라 속뜻을 모를 때가 가끔 있었고요   꽃은 해마다 새로 피지만 나는 늘 처음에 머물러 있어요   오랜 진행형은 활력도 되지만 갈수록 버거워요   꽃은 날마다 사랑을 생활하고 나는 늘 사랑을 공부해요       -전문-   해설> 한 문장: 이번 시집의 표제작 「거미백합」이 노래하는 사랑의 외곽선 또한 순수한 나신의 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미백합(Spider Lily)은 구미호를 모티브로 ..

예상했던 일 외 2편/ 이서화

예상했던 일 외 1편      이서하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비나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을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 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꽃 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받는 일   어떤 대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업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별일/ 이서화

별일     이서화      별일이 많은 요즘  주위가 온통 환하다고 여긴다  별일이란 나누어진 일이고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다른 유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별일을 별들의 일이라고 여긴다  별의별 일들이 많다는 건  별 뜨는 하늘만큼  맑은 날들이라고 위안으로 삼는다  간혹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날  갑자기 내린 우박이 그치고  햇살이 비칠 때도 있듯  별꼴 모양의 별일들   그렇게 별의별 일들이 많다는 것은  그동안 조물주의 참견이 많았다는 뜻  보름달이 뜨고  저 무수한 별들의 참견으로  밤하늘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오늘과 어제가 맑았으므로  별일이란 무수히 떠서 빛나는 것이다   맑고 흐린 날  그 속의 바탕은 다르지 않다   오늘 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별이 떠 있다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