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3169

장대가 있다 외 1편/ 정선희

장대가 있다 외 1편     정선희    아파트 공터 옆   긴 장대가 누워 있다 저 기다란, 나와 안면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 높이를 조절하던   균형을 잡아 하늘 한쪽을 받치면 마당이 기울어지는   장대의 저 자세는 우리 집 감나무에게서 배운 것   내 마음이 옆집 석류나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서   볼록하게 홍시로 채우고 싶었던 그 아이 볼을 다 보아서   그때마다 엄마는   구름을 타고 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지만   장대가 하늘을 치켜올리면 멍든 엄마도 없고   손이 밤도깨비 같은 아버지도 내 눈이 셋이래도 부족할 동생도 없고   그래, 인제 허공도 쉴 때가 되었지   뒷방 늙은이 같은 버려진 장대 끝   빈둥대는 추억을 손잡아 끈다    하늘이 텅 빈다       -전문(..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정선희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정선희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앉았다 파르르 손끝이 떨렸다   손 한 번 잡아준 적 없다고 울먹였다 너는 할 만큼 했어 옆에 있어 드렸잖니 엄마한테 듣고 싶은 말을 누군가 대신 해주었다   엄마는 누구의 엄마였나요 왜 나는 기억하지 않았나요 돈은 아들들한테 다 물어다 주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든 새, 어딜 보느라 엄마는 나를 볼 수 없었나요   나는 늘 맴돌았다 엄마의 포근한 소용돌이에 한 번이라도 젖어 들어 휘감기고 싶었다   괜히 나를 낳았다고 했다 실수도 어쩌다가도 아니고   정말 싫었던 괜히라는 말 어느 날 괜히 버려질 것 같은 아니 어느 날이 언제인지 몰라 괜히만 키웠던 눈치의 날들   엄마가 죽기 전에 꼭 물어봐야 한다  왜 나를 주워 온 아이 취급했나..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마당 가득 샛노란 이엉 뭉치가 쌓인 날, 동짓달 초하루 바람 자는 날 남늪아재 덕암양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키 큰 옹칠이 아재가 아래에서 두루마리 이엉뭉치를 올려주면 위에서 받아 추녀의 끝에서부터 두루루 펼쳐 지붕 전체를 꼭 안아주었다. 빗자루로 스윽스윽 쓸어서 볏짚이 골고루 퍼지면 새끼줄로 동여매어 꼭꼭 눌러주었다. 정침과 사랑채를 사방 돌아가며 추녀 끝에 삐죽 내민 볏짚을 가지런히 면도해주면 짧은 동짓달 해가 어느덧 똥맷등 너머로 꼴깍 숨었다. 머릿수건 벗어 툭툭 털어 땀을 닦고 횃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상에 막걸리 덕담이 구수하다   지금도 바람맞이 산고개 넘다가 되돌아보는 그  높은 음자리표    -전문(p. 106)      ---..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밤새워 내린 가을비 속속들이 울음 우는 들녘  푸르게 푸르게 젖어드는 이  내 그대 가슴에 들게 하여 나를 적시는 이  나보다 더 내 속을 잘 아시는 이   불을 내면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른다     -전문-   서정을 말하다> 부분: 시는, 일상의 굴레에 매여, 또는 그날이 그날 같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적으로 걸어가는 우리 삶을 일깨우고 쓰다듬어 꿈을 꾸게 하고, 묻혀 버린 삶의 핵심에 가닿게 만들어 준다.  시는, 그리움을 더 그립게 하고, 사랑을 더 사랑하게 하고, 슬픔과 아픔의 껍질을 깨어 더 슬프고 더 아프게 하여 치유에 다가가게 한다. 잠든 영혼을 깨워서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心眼과 혜안慧眼을 가지게 한다. 시는 ..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나무로 만든 시디집을 보다 그 위에 올린  인조 선인장을 봅니다  봄빛이 나무와 꽃들의 잎을 간질이는 계절에  붙박이 되어 한 줌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고독한 이의 그늘이 따라다니는 환한 아침을  생각합니다  누구는 언어의 집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자유로운 전원의 테마집을 생각하고  집의 상상만큼 길어져 가는 팔이 자판을 두드리고  몰래 한 사랑처럼 전등의 밝기가 어두운 지금  웃으며 달아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고요에 익숙한 풍경은 숨을 내쉬지 않고  들이마십니다  책들을 꺼낸 봉투는 덩그마니 잃어버린 몸을  잠시 기억하다 잠깐 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꺼낸 오늘은 투명한 햇살 아래  잡다한 생각을 합니..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를 본다  흘러내린 자국마다 뒷짐 진 그녀들이 온다  어제 내린 러브체인의 날개들을  사랑초 나비에 얹어 물끄러미 표지를 읽는 시간,  흩어진 표지들을 봄 햇살에 태워 주먹 쥐고  쪼그리고 앉아, 마이클이 주었던 연적을 손에 쥔다  파란 눈의 사내가 한국도자기를 가방에 넣어  절 단청을 기웃거릴 동안, 달과 6펜스를 부산역  한 모퉁이에서 읽어내며 수양버들은 슬프다는  영어의 표지를 읽어내던 시간, 잠시 춘몽이었다   봄은 나른하고 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표지에 실린 속삭임을 들으며 일어서는 동안  환몽이다  표지들이 뱉어내는 시각, 사랑초 흐드러지다  햇빛에 걸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

기쁨에 대하여/ 박찬일

기쁨에 대하여      박찬일  어느 행성의 암석에 박힌 말, 기쁨만 갖고 하루종일 어떻게 사나? 슬픔만 갖고는 살 수 있어도 기쁨만으로는 살 수 없어 기쁨 다음에 찰나랄 것도 없이 비애가 덮치기에 기쁨이 총회를 개최하지 않는 걸까기쁨의 총회에 초대받지 못한다, 초대받더라도 갔을까.아 기쁨의 총회가 없어진 지 오래 너는 왜 그러나 기쁨을 축하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다. 눈발을 걷는 저 사내의 힘찬 팔에 휘둘리지 않으면 기만이다 기쁨의 총회는 열리지 않는다. 눈발을 힘차게 걷는 저 사내도 곧 보이지 않는다 기쁨은 없다. 혹시 지나가버렸는지 모른다. 한 번만 한 번만 기쁨이 오면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수없이 결정 결정했어도 너는 기쁨을 차버리고 비애로 갔네. 비애가 너의 집이다. 기분이 전부일지 모르고 하나..

금호동 5/ _ 이별의 부호/ 박호은

금호동 5       이별의 부호     박호은    저 산 너머가 얼마나 좋으면  곱게 단장한 꽃노을  바람난 여자마냥 바삐도 넘어 가는가  내 엄마도 벽제 어느 산을 오르더니 소식이 없다  그 산 너머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초가을 오후 문득 찾아간 엄마의 뜨락  산국화, 쑥부쟁이, 구절초꽃들과 흐드러져  가을 햇살 등에 업고 반짝이고 있더라   그 은밀한 사생활을 목격하는 순간  유년의 저녁으로 소환되던 건조한 눈물   같이 놀던 친구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골목길은 붉은 그늘에 지워졌다   속울음 덮고 누운 밤  마음에서 보내지 못한 엄마의 팔을 감고  새우처럼 잠이 들곤 했다   살아 있는 자가 갑이어서  반짝이는 풀꽃들을 모조리 뽑아버리는 효孝  뿌리에 묻어 나오는 익숙..

금호동 4/ _ 슬픔도 사치라서 외 2편/ 박호은

금호동 4         슬픔도 사치라서      박호은    공동묘지 산비탈에 말뚝 박으면 다 내 땅이었을 때  찬밥 늘린 국밥으로 가난을 밀고 가던 엄마는  거친 생을 다녀가는 마흔여섯의 마침표가 됐다   흑백의 시간이 그늘을 굴리며 간다  날빛보다 더 밝은 곳으로  어린 눈물 밟고 가던 날   풀어버린 손이 미웠다  잡아끄는 울음마저 놓아버린 고요  싸구려 삼베 적삼 두루 말고 비탈 비탈 내려갔다   세상 인연 십삼 년  당신이 가엽다는 첫 생각, 철부지 그 정情이  닥나무 끈처럼 길고 질기다는 걸 그때는 알았을까   뒤돌아보는 눈빛이 있어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마음을 읽어 낼 수 없는  작은 아이도 늙고  기록을 다 훑어도 없는 함시남 그 이름이  내 살 속에 진언처럼 박혀있다   다 타버린 들..

푸른 바위 외 1편/ 이관묵

푸른 바위 외 1편     이관묵    바위 혼자 익는 저녁 옆에  바위로부터 슬며시  뺨을 얻어  등을 얻어  마음 개 놓고 고쳐 앉는다  바위의 일원으로   귀는 물소리에게 떼주고  눈은 구름에게 퍼주고   내가 바위로 익어  바위가 나로 익어   아무도 모르는 저녁이 왔다     -전문(p. 59)      --------------    서향집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  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되돌아 허공에 큰 울음 띄우던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