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빗소리 새장/ 주경림

빗소리 새장 주경림 빗소리가 하늘에서 땅까지 빈틈없이 금을 그어요 주룩주룩 방음벽을 둘러쳐요 한참을 빗소리에 갇혀 있다 보니 비와 비 사이에 틈이 보였어요 눈곱재기창으로 먹구름이 가득 밀려와요 빗소리 듣는 마음은 들창으로 크게 열려 먹구름을 타고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까지 날아요 스르륵, 비와 비 사이에 우주가 광활하게 펼쳐져요 -전문(p. 134)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주경림/ 서울 출생, 1992년『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씨줄과 날줄』『눈잣나무』『풀꽃우주』『뻐꾸기창』『법구경에서 꽃을 따다』(e북), 시선집 『무너짐 혹은 어울림』『비비추의 사랑편지』, 동인

벚꽃 한생/ 고영섭

벚꽃 한생 찰나의 행복 고영섭 벚꽃 터널 아래 서면 황홀합니다 예닐곱 때 장독 뒤에 숨었다가는 술래 잡던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스무 살 때 전우를 만나기도 하죠 벚꽃 화엄 아래 서면 극락입니다 서른 해 전 이웃을 만나기도 하고 마흔 해 전 동료를 만나기도 하고 쉰 해 전 벗들을 만나기도 하죠 아아, 눈꽃 가득 피운 나무 아래 서면 또 한 생이 찰나처럼 흘러갑니다. -전문(p. 123)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고영섭/ 1989년『시혁명』 & 1995년『시천지』로 작품 활동 시작, 1998~1999년 월간『문학과창작』추천완료, 2016년『시와세계』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몸이라는 화..

헌집/ 김현지

헌집 김현지 이른 아침 나팔꽃이 담장을 넘어와 안부를 묻는다. 밤새 안녕하시냐?고 키 큰 해바라기도 목을 빼고 들여다본다. 오늘도 별일 없으신지요? 산기슭 외딴 집 지붕 끝 난간에 까치 한 마리 고개 갸웃 내려다보며 묻는다 낼 모레가 추석인데 피붙이들 소식은 날아오는지? 궁금한 게 많은 길고양이들, 기웃기웃 문틈을 들여다보고 있는 -전문(p. 110)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김현지/ 경남 창원 출생,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으로 등단, 시집『연어일기』『꿈꾸는 흙』『그늘 한 평』『포아풀을 위하여』『풀섶에 서면 내가 더 잘 보인다』『은빛 눈새』등, 포토 에세이『취우산에서 10년,..

나무 왕생/ 유소정

나무 왕생 유소정 향내 가득한 여름날 밤 불을 피워 놓고 사라수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까지 옥소리를 내며, 북을 쳐, 징을 쳐 주루루룩 발맞추어 함께 춤을 추자 호乎, 얼마나 대단한가! 때맞추어 소리를 함은 길하게 하라, 길하게 하라, 길하게 하라! "나는 잊어버리고 꽃을 가져오지 않았다." -전문(p. 96)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유소정/ 2018년 『현대향가』로 작품 활동 시작, 현재 LREC교육·연구 디렉터 & MUSIC 테라피스트

내 시에서 불교 냄새가 난다고?/ 윤정구

내 시에서 불교 냄새가 난다고? 윤정구 오빠 시에서는 부처님 냄새가 난다고 수녀동생 생각해서라도 하느님 이야기를 쓰라는 누이야 시의 나라에서는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이 같이 노신다 -전문(p. 77)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윤정구/ 경기 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쥐똥나무가 좋아졌다』『사과 속의 달빛 여우』『한 뼘이라는 적멸』, 시선집『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 산문집『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동인

풍요(風謠)/ 이영신

풍요風謠 이영신 來如來如來如(래여래여래여) 오는구나 오는구나 오는구나 來如哀反多羅(래여애반다라) 오는구나 서럽구나 哀反多矣徒良(애반다의도량) 서럽기도 하구나 우리들이여 功德修叱如良來如(공덕수질여량래여) 공덕 닦으러 오는구나* 운문산 풀무치 상운암엔 늙은 비구스님 공양주라네 저 산 아래에서 지친 이들이 허덕이며 오르고 샘물 한 잔으로 입가심하고 나면 열무김치 감자전 밥 한 상 수북하게 차려 낸다네 쌀밥 한 수저 듬뿍 퍼서 입에 넣는 모습 보면 "우리 부처님네 밥 잘 드시네" 헤벌쭉 웃으시네 암자 근처까지 곧잘 내려오는 바람 구름 떼는 잘 여물다가 쭈그러진 머리통을 살살 간질여 주네 낮달도 슬며시 끼어들어 밥 한술 얻어먹고 싶어지네 -전문(p. 58) * 風謠 -------------------- * 향가시..

시절인연/ 이용하

시절인연 이용하 동백나무 한 가지의 푸른 잎과 붉은 꽃, 기색도 없이 툭 진 꽃은 누나였습니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그리도 서둘러 달님 따라 서쪽으로 간 것인가요? 그날 이후 꿈에서나마 종종 만났는데 그 속에도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내 꿈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지요 아, 마주 보아도 서로 알아보지 못해 새로 핀 꽃을 물끄러미 들여다봅니다. -전문(p. 46)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이용하/ 2019년『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너는 누구냐』, 동인

전라도 눈길/ 이창호

전라도 눈길 큰외숙모님을 추억하다 이창호 눈 덮인 들녘 얼음달빛이 차다 두승산 먼 능선 아래 달그늘이 시리다 가슴이 울컥 밀물 차오른다 창호야, 말 좀 해 보아라 말도 해야 느는 법이다, 잉? 아, 그 걸걸한 정 깊은 말소리 막내시누 그 막내아들 챙기시던 마디 굵은 목소리 -전문(p. 37)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이창호/ 전북 정읍 출생, 2007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거울』『6호선 갈아타는 곳』 등, 활동

그 역(驛)이 사라지다/ 정복선

그 역驛이 사라지다 정복선 봄눈에 아린 꽃눈을 내밀어 본 곳 그 역에 내린 지 이십여 년 삼삼오오 앉아서 지나온 철길과 역들의 모래바람을 토해 내던 곳 태풍에 떠밀려서 뒷걸음칠 때에 빠르게 떠나가는 기적소리에 하루를 베이던 곳 무연憮然히 주저앉았다가 다시 행성들을 따라 항해하려던, 아으, 그 역이 지구에서 영영 사라지다니 한 량輛의 나의 정신은 어느 역까지 가야 하나요? -전문(p. 24) -------------------- *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에서/ 2023. 12. 20. 펴냄 * 정복선/ 1988년『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선집 『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 시집 『종이비행기가 내게 날아든다면』『마음여행』『여유당 시편』등 8권, 영한시선집『Sand Relief』, ..

유령/ 이미산

유령 이미산 저 술렁이는 햇빛은 우리의 어깨 적시던 그날의 빗줄기 빛의 삼투압은 눈동자가 눈동자로 전하는 이야기 어쩌다 동시에 시작되는 투신 서로에게 음각되는 비명 그리고 각자의 길로 흘러가는 빗물처럼 훗날은 아직 몰라서 준비한 인사도 전하지 못해 젖은 어깨로 여백의 완성에 골몰했으니 혼자 즐기는 놀이 밤새 뒤척이는 한 줌의 미망 그런 날이 있었다고 어디쯤서 기다리는 우리의 언덕이 있어 회화나무 그늘에 서 있는 버릇이 생겼다고 저 쏟아지는 빗줄기는 내게 전하는 그의 목소리 저기요 부르면 홀연 사라지는 빛 빛 빛 -전문(p. 138-139) ----------------------- * 시터 동인 제8집 『시 터』 2023. 11. 30. 펴냄 * 이미산/ 2006년『현대시』로 등단, 시집『궁금했던 모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