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1120

믿음의 증거/ 성자현

믿음의 증거      성자현    내가 믿는 대부분은 소문  얼마나 확신에 차 있으면 사자 앞에 목을 내밀 수 있나  떨기나무 가운데 빛나던 불꽃,  발을 끌며 걸어가는 밤길에서 만난다면  믿음은 더욱 단단해질까, 이 역시 소문일 뿐  먼 옛날 현자가 있어 강가에서 소리쳤다 하나  내가 만지고 있는 것은 얄팍한 종이  내가 추종하는 것은 그 위를 기어다니는 활자  눈뜨면 소문에 소문이 더해진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무당벌레 같은 너의 외피  현란한 노래와 춤에 마음을 빼앗긴다  추측이 더 분명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끔 몽상이 불러일으키는 가설  내가 간직한 나도 모르는 비밀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오른다 할지라도  두려움으로 멈추게 될 발걸음  눈감으면 모두 사라질 외피들  그리고 증거들     -전문(p..

↔ (좌우화살표)/ 박정민

↔       박정민    냄새가 사라졌다, 타원의 무리를 몰고 모조리  알코올로 소독한 굴곡을 재구성하느라 36.5도 이상의 열기를 견디는 동안  입덧 바깥만 돌아다녔을 모든 익어 가는 것들의 냄새   먼저 냉장고를 열고 김치통을 열어 본다  그라인더 바닥에 깔린 원두 부스러기  하물며 변기 속 배설물도 냄새를 벗었다  커피와 보리차는 냄새 벗고 나서 서로 퉁치는 관계가 되고  새콤달콤한 향을 잃은 디퓨저는 의무를 벗었다   필통 속 볼펜들은 서로 엉킨다, 침묵을 고려 중이다  잉크 냄새 벗은 글자는 무게를 줄인 만큼 가벼워진다  입속 습관적 되새김질은 무미건조해지고  당신의 늙은 입냄새 나지 않는다  깔린 곳의 냄새, 내몰린 것의 냄새, 낮은 것의 냄새, 우울의 냄새  내게 나던 지독한 노화 냄새도 ..

속눈썹/ 황지형

속눈썹      황지형    창문을 밝힐 라고 말하자 사선으로 내린 빗물 깜빡거리고 속눈썹 떨린다 인공눈물까지 반짝인다 어깨에 뜬 별 달달하게 맺힌다 손과 무릎으로 한 봉지 촛농이 흘러내린다   수평선을 긋고 있다 이등변삼각형처럼 내부로 한 점 떨어지고 속눈썹 붙인 창문의 크기 구하는 방정식, 달고나를 붙인 보관함, 100피트의 거리 좁히자 혓바닥이 붙어 버린다   빗물이 반짝인다 누가 생일 파티를 위한 이라고 말하자 예의상 촉촉한 빛이라고 한다 달고나 작아지고 차가워지고 모형 틀에 찍혀 나오는 별들 100피트의 넓이 파먹힌 연인   눈빛에 반짝 헛디딘 발을 어루만진다 창문엔 물방울 맺혀 있고 검은 마스카라 아래 울음이 터질 듯 감긴 눈동자엔 뿌려 놓을 별이 없다 매듭진 행성 하나가 하얗게 사선을 긋는 ..

구성, 비의 잔상을 위한/ 이선락

구성, 비의 잔상을 위한      이선락    구겨진 종이 위에 비 내린다  해진 물방울을 읽는다 낡은, 구성Ⅲ*?   빨강, 고양이 등 뒤로 날 선 네모 기운다 셔터를 누르려는 찰나  뷰파인더 속 실루엣, 허벅지 사이 몇 방울의 비   줄이 맞지 않는 문장으로 엽서를 쓴다  주소가 없는, 끝내 되돌아온 이름 빗물에 번진다  (반지하 쪽문에선 푸른 머리칼 냄새 컹컹거렸지)   글씨들 들뜬 물방울 속 이름 몇 널브러지고  접힌 모서리 숨은 그림, 속이 비치고  (여자일까, 난간에 기대선 저 노랑)   점이었을까? 콤마, 아니 느낌표?  책이었다 몸이었다가 바람 지나가자 나무였다가, 검은   강이 흐른다  물속에 잠긴 그림자 위로 소나기   실루엣 속의 여자 빠져나간다  젖었던 속살 바랜다 희부연 사진 속,..

삽화가 된 휴지통*/ 김뱅상

삽화가 된 휴지통*      김뱅상    머그 컵?   휴지통 앞에서 말이 꺾인다   브도블록 한 장쯤, 기울어진 머그잔에 스트로 꽂아 넣자  뭉그러지는 속엣말 몇 모금   와글시끌, 끌려오는 발바닥 조각들  가로세로들, 콜라주   나 왜 휴지통 앞에 서 있지?         *   얼굴 따윈 필요 없어, 뒤통수를 반쯤 기울여 보면 알아  숨은 것들이란 가장자리 쪽으로 기울거든   머그 컵을 뒤집는다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소음 엎어지고  소프라노, 어제 죽은 여배우의 대사 비스듬히 선다   공중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너와 난 어깨를 들썩였잖아, 어슷 햇살이 잘려 나가는 찰나였어   라운드 미드나잇 흐르고  피카소 달리 에른스트 마그리트, 지나가고  머릿속에 엉겨드는 토끼 여우, 이건 뭐! 짐승도 아니..

오리온성운/ 김숲

오리온성운      김숲    하늘에서 상상이 반짝인다 컴퓨터 화면 속에 펼쳐진 성운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다 나는 벌처럼 1,300광년 떨어진 오리온성운으로 날아간다 상상력을 오리온성운만큼 키우다가 불타는 혜성처럼 잘게 부서트리기도, 빛을 산란시켜 지구의 저녁노을을 펼쳐 놓기도 한다 젊은 별들로 이루어진 트리페지움 성단에서 푸르게 빛나는 상상. 나의 청춘이 그 성단에서 빛나고 있다 신의 입김인 가스와 먼지구름 속에서 태어나는 어린 별들을 보기도, 프로토톡래넷 디스크 원시행성 원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말머리성운의 어두운 실루엣으로 들어가 히힝 울기도, 수억 광년 펼쳐진 우주 속을 달리다 말발굽을 오메가 성단에 놓고 왔네 수많은 상상을 조합해 만든, 아니 나의 삶 같은 초신성..

우화/ 윤유점

우화     윤유점    온 동네 소란하게  달 보고 짖던 견공  들창에 솟아오른  슈퍼문에 소원 빈다   삼킬 듯 돌연한 마음  취기 오른 행복감   끝없이 찬양하는   눈동자 번뜩이고  가면 쓴 얼굴들이  군림하는 붉은 세상   밤사이, 마법에 걸려든  성스러운 팽나무  싸늘하게 죽어 간다     -전문(p. 67)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윤유점/ 2007년『문학예술』로 & 2018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인생의 바이블코드』『귀 기울이다』『붉은 윤곽』『살아남은 슬픔을 보았다』『영양실조 걸린 비너스는 화려하다』『수직으로 흘러내리는 마그리트』

발자국이 흐느끼던 날/ 박장희

발자국이 흐느끼던 날      박장희    부리를 가슴에 묻고 외다리로 밤을 지새운 난 짓무른 눈으로 사소한 불일치에도 생각을 덧질한다 가벼워진 뼛속 공중에 뻗은 나뭇가지, 어둠의 모서리 긴꼬리에 회색빛 낮은음자리표로 앉는다 적막은 깃털만큼 겹겹이다   나의 부리와 꽁지는 점점 여위어 녹을 줄 모르는 얼음 위에 싸늘히 붙고, 침믁으로 깊어지던 악보는 높은음 쓸쓸한 박자로 깃털마다 스며들고, 훤한 햇살 아래지만 온통 검회색이다 적막은 찢을 수도 칼로 도려낼 수도 불로 녹일 수도 없는, 날개가 있어도 비상할 수 없고 허공이 있어도 자유가 없다   핑크 난 풍선 찢어지고 무너져 내린다 목 뜯기고 뽑힌 깃털 푸르죽죽 울긋불긋, 목 안에서 모래바람 회오리친다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어떤 풍경도 바라볼 수 없고..

일단 멈춤/ 박순례

일단 멈춤      박순례    삼십 년 된 장롱을 버렸다  나를 버렸다  이십 년 된 장식장을 버렸다  꿈을 버렸다   왕골 돗자리를 버렸다  추억을 버렸다  매 묵화 병풍을 버렸다  과거를 버렸다   접시를 버리려다 멈춘다  이유식을 먹이던 접시  버리려던 딸아이들이 빙글 돈다   접시를 돌린다  꽃을 따라다니며 엄마 놀이를 하고  애기 오리가 점점 자라  삼지창을 든 오빠와 뒤뚱거리던 오리 궁둥이들  멜라닌 접시에서 아이들 논다   대낮인데 하늘엔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달콤하게 꿈을 키우던 아이들  접시에서 지금도 뛰어논다   햇살이 접시 안에 듬뿍 안긴다     -전문(p. 50-51)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김도은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김도은    의자는 의자를 보고 있다  의자는 의자를 보는 의자를 외면한다   의자는 등받이가 없다  의자는 의자의 등받이를 내주었다   등이 없어진 의자  등이 있는 의자에 앉는다   의자를 보던 의자 의자를 외면한 의자  그 의자는 무엇으로부터 왔을까      -전문(p. 43)     -------------  *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펴냄   * 김도은/ 2015년 웹진『시인광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