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7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4 정숙자 다시 가을입니다. 당신 생각을 하면 가슴 무너지는 ᄀᆞ을입니다. 어느 때라 무너지지 않을 가슴이겠습니까, 마는 가을엔 열 곱 스무 곱 무너집니다. 뭇 별 저마다 총명하고 바람은 어디론가 바삐 가는데 저만이 돌이 되었습니다. 우박이든 번개로든 이 몸에 부처 얼굴 새겨 주소서. 어쩌면 가을은 ᄀᆞ장 깊은 말씀이겠지요, 마는 그래서 더 파래지는 하늘이겠지요, 마는···. (1990. 9. 6.) 사뭇 슬플 땐 어떤 말을 써도 시가 됩니다 슬픔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ᄆᆞᆭ이 체험하는 기온 중 하나이지만, 그렇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ᄋᆞᆭ는 추위입니다 -전문(p. 70) ● 시인의 말 세월 저쪽의 미발표원고 한 묶음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을 뭐라 표현해야 하나? 야생이란 말..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3 정숙자 달 중에 제일 어린 초승 달님은 달 중에 제일 예쁜 꽃잎이래요 천성으로 지닌 둥그런 사랑 강보에 ᄊᆞ여 모르는 채로 하루 건너 발그레 벙그는 얼굴 기러기도 구름도 들여다보곤 황홀히 입 맞추며 떠난답니다 바람 함께 조심조심 지난답니다 (1990. 8. 31.) _ 서른 중반을 넘긴 딸과 제가 거실 창가에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만개한 날이었지요. ᄄᆞᆯ과 저는 35년+35년 동안의 추억을 불러냈습니다. 그러다가 저 달이 정말 그 옛날 그 달일까? 제가 ᄃᆞᆯ을 향해 불쑥 물었습니다. “야, 니가 진짜 그때 그- 달이냐?” “엄마, 저 달이 나이가 몇인데 반말이에요?” (아아, 얘가 동시를 잘 지었었는데···, 열어줘야 했는데···, 文이···, 세상이···, 힘..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8 정숙자 기쁨은 부서져 진흙에 떨어지고, 슬픔은 내내 솟구쳐 그것만이 제 것인 줄 알았습니다. 모처럼의 햇빛, 백일하에 사라진 창가에 서서 껐ᄃᆞ - 켰ᄃᆞ 생각을 반복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 암울暗鬱을 우주 밖으로 힘껏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슬픔도 기쁨도 아닌 고요가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 ‘거기 정박하기 위하여서는 흔들림이 필요했던 것이니라, 고··· 고요는 맨 나중에 닿는 섬이니ᄅᆞ, 고··· 뒤늦게, 뒤늦게 어림짐작하는 오늘은 또 다른 어제입니다. (1990. 8. 25.) _ 공우림空友林이라는 집의 이름을 저 무렵에 지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먼 길을 돌아왔는데, 다시금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꾹꾹 참고 잘 살아왔는데, 이제는 아무리 좋은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7 정숙자 창문을 열면 포플러ᄀᆞ 보입니다. 맨 먼저 봄을 알리는 이, 가을의 최종을 알리는 이도 상냥한 잎파랑이의 저 포플러입니다. 봄, 여름 내내 그는 반짝임과 바람 소리로 매번 저의 상심한 시간을 치료해 주죠. ᄒᆞ지만 그에게도 겨울이 오면 목소리 잃은 인어처럼 말이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창문을 열고 ᄇᆞ라봅니다. 오랜 우정은 침묵 속의 언어를 알아듣는 까닭입니다. (1990. 8. 21.) _ 저에게 아직도 지구가 아름다운 까ᄃᆞᆰ은 사랑하는 사람이 살기 때문입니다 - 전문(p. 120) ------------ * 『문학과창작』 2022-겨울(176)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5 정숙자 냇물이 들녘을 깨웁니다. 금빛/은빛 명멸하는 물별*들은 누구도 건져갈 수 없는 자음/모음들이죠. 행간엔 나비와 풀꽃, 풀무치와 메뚜기, 잠자리 소금쟁이 등 낯익은 기호들이 함께 살고요. 혹 얼음이 덮어버려도··· 어둠이 ᄊᆞᆨ 다 지워버려도··· 해 뜨면 새로이 반짝거리는 시+냇물은 태양의 휘호일까요? (1990.8.18.) # 2022. 8. 8. 가운데가 텅 빈 도넛형 시들 읽고, 읽고, 읽고 또 읽다 보면 가자, 가자, 두 눈 ᄄᆞᆨ 감고 가자 딜레탕트(dilettante)에 불과했던, 꿈과 미래였던 모던(modern)을 벗고 이슬 눈 글썽이는 쪽으로 가자 -전문(p. 69) * 물별: 물결이 햇빛을 반사할 때 생기는 섬광(필자의 신조어)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2 정숙자 몰랐던 바에야 그립지도 않았으련만 구태여 알고서 애끓는 마음이여! 저녁 새 지저귀는 슬픔 무렵을 유난한 침묵으로 마주하는 ᄇᆞᆷ. (1990. 8. 5.) 밭이랑 풀들이 말없이 뽑혀주듯이 비탈에 움튼 곡비哭婢들 깊은 발자국 저만치 뽑혀 나 갔 지 -전문 (p. 73) ------------------------- * 『文學 史學 哲學』 2022-가을(70)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1 정숙자 별똥별 하나가 결심한 양 뛰어내립니다. 찰싹이는 파도를 베고 해안의 밤이 깊어갑니다. 저는 모래밭에 앉아 온갖 생각을 잊어버립니다. 하루뿐일지라도 이런 밤이 있음을 행복해ᄒᆞᆸ니다. 아까 떨어진 그 별똥별은 하늘이 제게 준 선물일까요? 저의 삶과 죽음 또ᄒᆞᆫ 어느 날 이 세상에 선물이 될 수 있기를 성심껏 기도하겠습니다. 덧붙여 제 삶과 최후 역시 아ᄁᆞ 그 별똥별처럼 공기 중에 소멸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빌겠습니다. (1990. 8. 4.) _ 삼십여 년 동안 저 표정 하나를 얻었습니다 구름이야 모를지라도 제 얼굴 어딘가에 들어있을 한 생각이란 바람=사람 사람이 바람이라는 경험 값, 바로 그것입니다 -전문 (p. 72)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4 정숙자 자고 깨면 자라는 풀잎에게는 자고 깨면 맺히는 이슬도 많지 내일은 어떤 바람 불지 몰라도 꽃받침 다듬느라 연이은 밤샘 자고 깨면 ᄇᆞᆲ히는 풀잎에게는 ᄌᆞ고 깨면 반가운 나비도 섧지 (1990. 6. 20.) 약질이었던 저를 아버지는 늘 꾸짖으셨죠. 더 먹어라 걸핏하면 울지 말아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라 그러시면 더 울었던 제ᄀᆞ 어찌어찌 일흔을 먹었습니다. 젊은 ᄂᆞᆯ 객지에서 올렸던 편지와 같이 “저는 잘 있습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어느 하늘에 계시더라도···, 어느 달빛을 보시더라도···, ···, ···. -전문 (p. 143) --------------------- * 『시현실』 2022-가을(89)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3 정숙자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게 몸 굽히는 일인 줄 아기 난蘭은 몰랐습니다. 자라면 자랄수록 휘어지는 잎. 때 되면 곧게 일어선 줄기에서도 꽃만큼은 숙인 채 피우지 않았겠어요? 이곳에 와서 저는 많은 친구를 만났습니다만, 가장 ᄆᆞᆰ고 ᄄᆞ뜻한 벗으로는 마디게 ᄆᆞ디게 자라는 그였습니다. 잠시라도 를 잃을까 봐, 난초는 굳이 저에게 왔을 테지요? (1990. 8. 초.) _ 그때 사랑했던 난초들은 오래전 땅에 심어 줬습니다. 언제든 수명이 다할 텐데 분盆에 갇힌 채 그렇게 되리라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지요. 잠시라도 대지에 서서 이슬과 바람, 햇빛과 어둠, 구름과 별들도 만나라고요. 오늘은 고유 번호 ‘No, 22-106’의 편지 ᄒᆞᆫ 통을 썼습니다. 이로써 저의 자정은..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0 정숙자 마지막 하나를 놓았을 때 그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한 줄기의 파도가 먼바다로 돌아가 무수한 흰 꽃을 몰아오듯이, 향기와 빛과 노래들이 텅 빈 해안을 감쌌습니다. 하나뿐인 하나를 잃는다는 건, 전혀 다른 또 하ᄂᆞ의 태양이 움트는 것이었습니다. (1990.7.26.) _ “페소아는 고향인 리스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후 친구들은 그의 방에서 커다란 궤짝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초고와 단상 27,543매가 들어있었다. 생전에 페소아는 무명의 작가였다.”(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2014. 봄날의책. p-799) “기나긴 연구작업 끝에, 마침내 페소아 사후 거의 50년이 흐른 1982년에야 최초로 포르투갈에서 『불안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