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7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2      정숙자    저의 또 하나의 주소는 공중입니다. 눈을 감고 둘러보는 정원 가득히 이따금 미풍이 불어옵니다. 등기소유권 없는 그 울에서 저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평온을 조각합니다. 어떤 고요는 ᄁᆞᆩ아지른 벼랑과 격랑의 시간이 저에게 베푼 여적입니다. (1990. 10. 14.)                이 세상은 어딘가에  슬픔이 있어 아름다웠습니다  그 슬픔 배우고 적응하느라  긴 생애 천천히 채울 수 있었습니다   슬픔 없이 어떻게 평온이  기쁨인 줄 알 것이며  인내 또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겸손이란 것도, 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었음을…  ∴ 내 가장 가ᄁᆞᆸ고 오랜 외우畏友   슬픔이여- 안녕…   언젠가는 삼라만상을 향해 숙이듯이  그에게도 정중히 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1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1      정숙자    어느 하루를 위해 살아야 한다면 먼 후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서 있겠습니다. 삶을 일깨우는 길은 일 초 일 순 지성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에게 일러줍니다. 오늘인즉 한 틈새 풀꽃일 테니까요. 얼핏 헛디딘 한 걸음이 일껏 ᄊᆞᇂ은 탑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을 거니까요. 오늘은 오늘 하루의 과제이기보다 전 생애가 걸린 난제가 아닐까요? (1990. 10. 9.)               문득 ‘외로운 나그네’란 어휘가 스친다  칫솔 치약을 손에 든 순간  거울 속 나에게  누가 보낸 메시지일까?   ‘외로운 나그네’  이거 나에게만 와 닿은 파동일까?  혹, 전 인류 앞에 동시 발송된 파장일까?   한두 뼘 더 나아가 종種을 초월한 명제일까?   아차, 시..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0      정숙자    가을은 사유를 자유롭게 합니다. 지친 영혼을 충전시켜 줍니다. 길 떠나는 철새들에게 손수건 흔들어 보이는 억새  꽃 언덕. 더 총총 더 맑게 떠오른 별들을 보노라면 제 삶에 얹힌 돌도 얼룩을 잊어버립니다. 아아 그러나 가을은 멈출 수 없는 외로움을 몰아옵니다. 마음이 맑아진다는 것 자체ᄀᆞ 외로움>이ᄅᆞᆫ 병환의 시초입니다. (1990.10.13.)               책이 우는 걸 보았습니다  사람이 울어도 차마 못 볼 일인데,  책이 울다니,  책이…,   삼십여 년 한곳에 세워두었던 책을 이사 와서 다시 가나다순으로 장서했거든요. 앗 그런데 표지 날개에 끼워진 첫 장을 어느 책에서 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날개 속에 여유분의 틈이 없어서 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8 정숙자 창조 창작 자연 예술 태양 등불 태양도 때로는 눈물에 휠까? 피가 끓기도 할까? (1990. 10. 4.) ‘싶은’ 그것이 사라졌다. 더 갖고 싶은, 더 맺고 싶은, 더- 더- ‘더’가 ᄉᆞᄅᆞ졌다. 이런 게 정화인가? 승화인가? 순화인가? (요즘 빈번히 체감하는 악 중 악) (그로 인한 효과일까?) 소박한 말씨와 웃음들이 미래형으로 안착한다. 각인은 공간을 겸한 시간까지도 거기 고정시킨다. -전문(p. 67) ------------- * 『미래시학』 2024-봄(48)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7 정숙자 그믐달에 줄 매어 공후로 탈까? 화살촉에 꽃 매겨 서편에 쏠까? 마음 없는 마음은 천지도 한 뼘 오르ᄅᆞᆨ내리ᄅᆞᆨ 먼먼 그네를 타네 (1990.10. 4.) 오래전 저 뒤뜰이 서리 낀 하늘이었군요 그 밤은 분명 협곡이었는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요?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뿐입니다. 협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란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다만 수직/수평으로 한 올 한 올 ᄍᆞ보는 거였습니다. 아무리 가느다란 실일지라도 진실/진심을 부어보는 거, 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협곡의 삶,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캄캄히 진화 중입니다 -전문(p. 66) ------------- * 『미래시학』 2024-봄(48)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6 정숙자 여름날 뭉게구름만큼이나 많은 슬픔을 농사지었습니다. 그 목화로 실을 뽑아 하늘 닿는 가락을 수놓으려 합니다. 희디흰 실을 뽑고 남은 씨앗으로는 내일을 그리지요. 검고 검은 겨울밤이면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와 ᄒᆞᆷ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삐걱삐걱 세상을 읽겠습니다. (1990. 10. 8.) 지금, 이곳은 어디일까요? 연옥이란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에 쓴 사후 세계 어디일까요? 아닌 듯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하루하루ᄀᆞ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저녁노을이 새삼 꽃ᄃᆞ웠습니다 -전문(p. 2_자필// p. 160-161_한컴) ----------------------- * 『딩아돌하』 2024-봄(70)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2 정숙자 바람이 조용하고 맑은 햇빛을 동그란 탁자 위에 놓고 갑니다. 저는 이 꽃다운 편지를 마저 읽지 못하고 당신께 갑니다. 당신의 초대에 늦을까 봐 서둘러 눈을 감고 지름길로 ᄀᆞᆸ니다. 당신은 사원이나 궁중에 아니 계시고 무한한 대기 중에, 공기 중에 계십니다. 당신께서 초대하신 장소는 언제나 제 마음속 가장 깊고 조용한 골ᄍᆞ기임을 외웠기 때문입니다. (1990. 9. 20.) 방금 samsung man이 다녀갔습니다. 냉장고 야채박스 밑에 자꾸만 얼음이 깔리기 때문이었어요. 거뜬히 A/S를 마친 뒤 그는 뭐 더 불편한 게 없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기를 넣어도 움직이지 않는, 20년은 족히 넘었을 소형 분쇄기를 꺼냈습니다. 바쁠 텐데도 그는 분쇄기를 해체/조립했습니다...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5 정숙자 화분에 갇힌 난초가 꽃을 피웠습니다. 말 못 하는 풀임에도 제 그리운 데를 바라보느ᄅᆞ 문 쪽으로 목이 휩니다. 꽃피움만이 그의 언어요 자유이거니, 향기는 그의 날아가고픈 마음이요 숙여 핀 꽃은 안길 데 없어 되돌ᄋᆞ온 메아리임을…, 불립문자로 읽었습니다. (1991. 9. 26.) 아침이면 유리창 가득 눈 맑은 햇빛이 웃어줍니다 일흔 넘도록 자획만을 애끓은 이가 굶지도 않고…, 먼 골에 묻히지도 않고…, 이로써 족합니ᄃᆞ 당신께 드릴 오늘의 꽃은 ‘이로써, 이로써 족하옵니다’ -전문(p. 75-76) ----------------- * 『시결』 2024-봄(창간)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4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4 정숙자 아득히 먼 곳을 동경하기보다 제 몸담은 이 땅을 사랑하겠습니다. 제 영혼을 도와준 풀꽃, 이슬, 바람이 사는 이 흙을 언제까지나 사랑하겠습니다. 그들이 제게 준 기쁨을 갚으려면 몇 생을 바쳐도 부족하겠지요. 이 행성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하고 아름다운 별입니다. 제가 죽은 뒤 공기가 되면 이 지구를 지날 때마다 꼬옥 안고 한참씩 머물다 가겠습니다. 돌아보며, 돌아보며··· 가겠습니다. (1990. 9. 21.) 한 번 쓴 물 잘 간수하여 다시 사용할 때 행복하다 스카치테잎 잘 떼어 여기저기 다시 쓸 때 뿌듯하다 헌종이에 생명을 한 번 더 부여할 때마다 산뜻하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매시간 보람 있고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런 건 시가 아니고, 책이 아니며, 돈도 아니지..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3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43 정숙자 당신은 애인들을 위하여 많은 태양을 갖고 계십니다. 마치 개울물과 호수를 위하여 수ᄆᆞᆭ은 달을 풀고 계신 것처럼. 저는 그 애인들과 태양을 질투에 들이지 아니합니다. 분배된 만큼의 빛만으로도 꽃 총총 열 수 있음을 어느 아침 매화가 귀띔해 주었습니다. (1990. 9. 20.) 멀리 보이는 산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에겐 카프ᄏᆞ와 칸트와 니체 같은 이름들의 봉우리 위로 피어오르고 지나가는 구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문/학은 대지를 빛내며 유유히 사유하는 강물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가끔 그 언덕을 따라 걸었지만, 끝ᄁᆞ지 가지는 못하고 바람에 옷깃을 맡기며 감동과 경외감만을 띄워 보낼 뿐이었습니다. 차츰 나이 들면서 그들의 의지는 그들이 뿜어낸 피요, 뼈라는 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