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274

시인이 바라본 어느 시인

시인이 바라본 어느 시인 정숙자 미개척의 어둠 속에서 금강석을 캐내며 멎지 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거나 빠른 답을 찾느라 간신히 치켜든 등불마저 놓치고 말지 하지만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암흑이 햇빛이겠지. 그 속에서라야 아직 부화하지 못한(않은) 언어를 깨울 수 있지. 삶이야 가냘프고 고달프고 아프겠지만 그렇게 얻은 문장만큼은 톡톡 여물어 코끼리가 밟아도 안 깨지겠지. 어둠 속에서 칠흑 속에서 고립된 지옥 안에서 뜨겁게 고이고 파랗게 식힌 그 절규가 바로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든 한 구절 섬광이겠지 왜 이렇게 ‘프’ 字는 슬프-ㄴ 것일까 아차 ‘배고프다’도 있네 아 앗차 ‘구슬프다’ 도 있었군, 그래 그래그래 시인에게는 그렇게 힘없는 잎이 한결같은 꽃이었구나 한 올 무모한 실 위에서 소나기와 눈보라도 몸..

이슬 프로젝트-55

이슬 프로젝트-55 정숙자 우공이산// 내 몸에 흐르는 개울과 시내와 강물은 붉고 따뜻하지만, 지구를 싸고도는 동맥과 모세혈관은 무색투명하고 부드럽고 차다. 내 몸속 피가 고갈되면 나는 그 즉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시신조차 머잖아 먼지가 되고 말 것이다. 육체가 흩어지고서야 정신인들 말해 무엇하랴. 그를 일러 죽음이라 꺾고. 지금 당장 컵에 받으면 먹을 수 있는 물, 채소 한 잎 헹구지도 않은 물을… 변기에 쏟아버리는 일을 나는 차마 수용하지 못한다. 그건 ‘물의 굴욕’, ‘물의 굴욕감’이 깊이 전해져. 주방에서, 다용도실에서 빨래든, 채소든, 그릇이든 2차 3차 헹군 물이거든 화장실로 옮겨 다시 한번 살려 쓴다. 그건 ‘물의 자존심’, ‘물에 대한 오마주’ 한 옴큼이라도 애틋하다. 글을 읽느니보다..

고유 시간

고유 시간 정숙자 열셋, 그때, 나는 미래를 팔아 시를 샀다 그것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장차 그것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도 모르고 한 꼬투리의 의문을 품거나 영문도 모른 채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수면에 비친 하늘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러한 나는 한낱 ‘시’라는 공간의 얼뜬 지느러미에 불과했으나 파고波高의 율동에 끼어 쉴 새 없이 아가미를 여닫았다 잠들 때조차 모자란 눈을 감지 못했다 여타의 인내와 고뇌와 얼핏얼핏 스치는 황홀 따위를 조각조각 전신에 이어붙이며, 언제였던가 섬 한가득 피 흐르던 밤, 나는··· 없는 발을 수초에 묻고 별들의 산란을 바라보았다. (저건 필시 달의 사유/ 부스러져나간 달의 육체와 정신일 거야) 헤아리고는 어둠의 기하학을 아스라이 이해하였다 바다에는 때로 용龍이 오르고 해적이 살고 삼..

니체 이후의 신

니체 이후의 신 정숙자 이제, 아니 그 후로는 누구도 권선징악을 책임지지 않는다 거기 기댈 수도 책망할 수도 없다 다만, 하늘은 말이 없고 타자를 시켜 울게 할 뿐이다 개울물 소리와 저 시냇물 소리, 문득 새파래지는 한밤의 풀벌레 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면 못 알아들을 말도 아니다 “슬픔도 참으니 참아진다”고 대나무에도 이르지 않고 구름에도 얹지 않고 바람에도 부치지 않고 견디고, 견디고, 견디고, 견디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고 그렇게 산을 넘으면 자신을 넘어버리면 멀리서 들녘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런 게 몇만 번이었던가 평생을 사는 동안 은발의 습격에도 슬픔은 소진되지 않는 것이었으니! 끝없이 솟아나고 솟구치고 어디에, 그 많은 이 깊은 슬픔이 대기 중인 것인가? 예술이란 혹자에게는 그것 없이는 살 ..

마주친 눈

마주친 눈 정숙자 하늘은 한 알의 눈이다. 밤에조차 감기지 않는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지켜보고 세며, 무한대로 기억한다. 결코 흘리지 않는다. 문득 저지른, 혹은 미리 짠 소행일지라도 처음부터 덜커덕 세상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기다린다.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염치를 되찾기를 본래의 순수를 회복하기를. 하늘은 인간보다 훨씬 자비롭다 ∴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은 속담이 아니라 금언이다. 꼬리를 밟은 이 역시 아무개가 아닌 하늘이건만, 들킨 꼬리는 목격자를 일러 철천지원수다 창끝을 간다. 우리가 놓아준 민달팽이 한 마리, 물기 마른 지렁이를 애써 풀 섶에 옮겨준 일, 맥없는 약자에게 함부로 굴린 눈 등 하늘은 차곡차곡 엮어두고 종종 들추어본다. 하늘 우러러 부끄럼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5 정숙자 그들은 이슬 한 방울 바람 한 줄기에도 허리를 굽힙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정령이랍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는 가을엔 우리 모두 겨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들이 돌아와 다시금 기도를 시작하면 냇물은 윤기를, 나비는 자유를, 나무는 꿈을 되찾게 되지요. 그들은 오늘도 대지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신의 아기이며 저의 친구인 그들 이름은 돌보는 이 없이 자라는 이랍니다. ---------------- * 2021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천태산 하늘북』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9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9 정숙자 처얼썩~ 처얼썩~ 파도에 섞여, 먼 옛날 여왕의 전설이 들려옵니다 태양은 그녀의 왕관이었어요. 어느 날 여왕은 성 밖에 나갔다가 (우연히) 가난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머뭇머뭇 왕관을 매우 부러워하는 것이었어요. 그러자 여왕은 매일매일, 하루의 절반 동안씩 여인에게 왕관을 빌려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여인이 왕관을 빌려 간 시간만큼은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상냥한 빛의 요정들은 여왕의 검은 머리에 별을 장식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착한 나라의 여왕과 여인은 지금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합니다. ---------- * 웹진 『시인광장』 2021-10월(150)호

흑백 무지개

흑백 무지개 정숙자 어느 하루 어느 한순간도 삶을 느끼지 않은 날 없었다 삶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만큼 편안한 죽음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만큼 평온한 그런 악기가 아니었다, 는 증거다 이 말은 (그는) 늘 죽었다, 또는 늘 아팠다는 알토aito와 다르지 않다 죽을 수도 없는 죽음 이상인 바다를 향해 직진하도록만 설계된 (그는) 태풍의 옥타브일까? 그런 음역에서 벗어나고자 끝까지 가 보면 거기 다 갖춘마디가 있을 것이다, 기다리며··· 쓰러질 수도 없는, 그의 발목을- 무릎을- 의지를- 성실성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죽음은. 그래! 살아주마, 살아가마 바꿀 수 없는 항로 순백의 순흑색의 7악장이여 나는 오늘도 살았노라 살아왔노라, 애써··· 전 생애를 그렇게 이렇게 가고 있다 파도를 켜고..

펜과 강

펜과 강 정숙자 시는 체험이자 추체험이다 누구든 시의 아름다움에 한 번 눈뜨면 그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이나 부富의 위력도 시 앞에서는 별무소용. 시의 궤도에선 오로지 시만이 위도가 될 뿐. 그렇다면, 정녕 시란 무엇인가? 맞닥뜨릴 때마다 답변이 묘연하다. 그런데도 분명 좋은 시는 현실을 가로지른다. 신의 축복을 받은 몇몇 pen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는 강. 시인은 성직자만큼이나 신과 가까운 존재라 한다. 시인에게 한 송이 돌멩이를 주어보라. 시인은 그와도 너끈히 대화할 것이다. 숲속의 마지막 요정이 아닌가 싶게. 시인이 그 투명한 날개를 저어 날아가 버리지 않고 여기 남아있는 까닭은, 아직 뜨거운 피의 무게 때문이다 아직 뜨거운 피의 진실 때문이다 시인은 돌연 태어나는 자이며 여타의 일에 복무..

푸앵카레의 우측

푸앵카레의 우측 정숙자 행성들이 둥글 수밖에 없는 이유. 과일들이 모서리를 잃어버린 이유. 그게 다 바람과 천둥과 벼락에 스치다 그리된 것이다. 사철 두고 대신 울어주는 폭포며 풀벌레며 새들이··· 흰 살 드러내고 찢어지는 설해목의 울음을··· 새끼를 빼앗긴 개와 고양이와 염소와 종마의 울음을··· 갑자기 당한 실패와 좌절 앞에 끓어오르는 인간의 울음을··· 누군가 어디선가 울어주고 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들꽃들이 구름과 돌멩이와 모래알이 둥근 이유는 인간보다 앞서 울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앞서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들은 자신의 울음을 끝낼 만큼 둥글어 졌다 그리고 ‘사물화’되었지만 아는 것이다. 둥긂 속에 버려진 것, 버려야 할 것, 그러나 버려지지 않은 최초의~ 최후의 그 눈물의 형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