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252

박제천_시낭송 축제(발췌)/ 비천 : 박제천

비천 박제천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의 슬픔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의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떠다니는 물결이었다 물결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아지랑이가 되어 바다 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바램이었다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흘러다니는 구름이었다 구름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움이며 미움이고 말씀이며 소리였다 참으로 오랜 동안 나는 떠돌아다녔다 ..

권두언 2023.02.05

사랑의 메시지/ 김우종(金宇種)

사랑의 메시지 김우종金宇種/ 문학평론가 · 한국문인협회 고문 창작 활동은 윤동주가 「산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허망해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목이 쉬도록 짖어도 저 혼자만 듣는 산울림. 이것은 이 세상에 저 혼자만 있다는 무한 고독의 확인이며 이 세상이 몽땅 귀머거리라는 뜻이다. 쓰고 발표하는 행위가 이렇게 된다면 문학을 위한 원고지와 컴퓨터는 몽땅 쓰레기통으로···. 쓰고 발표하는데 독자의 응답이 없는 것은 유명 작가도 마찬가지다.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감동했다는 팬레터는 매우 드물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으면 그것은 윤동주의 까치소리처럼 외딴 산속의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원고료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경우라면 부끄럽기도 하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

권두언 2023.01.25

부고_ 박희선 시인 별세, 향년 80세/ 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 : 박희선

할미새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희선(1941-2021, 80세) 늙은 소나무에 세 들어 사는 할미한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왜 보름째나 밭에 올라오지 않느냐 몹시 궁금해서 전화를 했단다 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더니 지난봄에 큰 수술한 곳이 지금도 많이 아프냐고 되물었다 감나무와 호두나무 대추나무들 고라니와 멧돼지, 곤줄박이와 콩새 산비둘기까지도 내가 보고 싶어 모두 안달이 났다고 하얀 거짓말까지 보탰다 우리 보리밭은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에 고라니 큰삼촌이 돌아가셔서 온 집안이 조용히 보낸다고 말했다 지난 장날부터 호두나무 옆에 도라지꽃들이 만발했는데 자기는 보랏빛 꽃보다 흰 꽃이 더 예쁘다면서 혼자 웃었다 -전문- ▣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이성교(1941-2021..

권두언 2023.01.22

부고_ 이성교 시인 별세, 향년 89세/ 가을 운동회 : 이성교

가을 운동회 이성교(1932-2021, 89세)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 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있었다. 하루 종일 빈 집엔 석류가 입을 딱 벌리고 그 옆엔 황소가 누런 하품을 토하고 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온갖 산들이 모두 다 고개를 늘이면 바람은 어느 새 골목으로 왔다가 오색五色 테이프를 몰고 갔다. -전문- ▣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이성교(1932-2021. 12. 7. 향년 89세) 시인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국학 대학, 중앙대 대학원 및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6년 『현대문학』에 「윤회」 「혼사婚事」「노을」등이 추천되어 ..

권두언 2023.01.21

부고_ 신규호 시인 별세, 향년 83세/ 돌 : 신규호

돌 신규호(1939-2022, 83세) 당신이 던져놓은 그 자리가 내 자리다 별똥이 떨어진 곳 그 자리가 내 자리다 흙과 바람과 풀들만 남고 모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라 당신이 머물라면 태산처럼 남을 게고 당신이 오라 하면 깃 달고 새처럼 날아가리라 -전문- ▣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신규호(1939-2022. 1. 10. 향년 83세) 시인 서울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학과, 단국대 대학원을 졸업헸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허허실실』 『입추이후』『맨발의 사람』『보랏빛 마을』『빈 항아리』『먹감나무 춤』『거대한 우울』『장승의 노래』『중생일기』등이 있다. 펜문학상/ 문덕수문학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제17대 현대시인협회 이사장 & 성결대 부총장 역임. 2000년 창립~20..

권두언 2023.01.21

부고_ 신기선 시인 별세, 향년 89세/ 연어떼 : 신기선

연어떼 신기선(1932-2021, 89세) 한 사 오 년 동안 같이 놀다가 고향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물고기 첫 눈 뜨고 어린 몸으로 한 번 온 길을 이만 킬로, 삼만 킬로의 험한 길을 음양을 따라 방향을 잊지 않고 낙동강으로 두만강으로 찾아오는 물고기 제 물빛이 가까울수록 높은 폭포를 뛰어 오르고 공해에 오염된 물길을 거슬러 미친 듯이 춤추며 제가 난 땅을 찾아오는 물고기 맑은 제 물냄새 맑은 제 모랫벌에 기뻐서 기뻐서 알을 낳고 죽는 고향을 알고 있는 물고기. -전문- ▣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신기선(申基宣, 1932-2021. 12. 30. 향년 89세) 시인 호 범석凡石, 함북 청진 출생이다. 광복 후 월남해 1956년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하고, 1956~1957년에 걸쳐 조지훈 3회 추천으로 ..

권두언 2023.01.19

조미애_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 당숙(唐肅)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당숙(唐肅, 1318~1371, 53세) 비위투간위호기/ 非爲投竿爲好奇 고기를 잡으려는 것은 꼭 아니었으나 강한동절조옹자/ 江寒凍折釣翁髭 강바람 추위에 수염이 꽁꽁 얼어붙었네 연지설압봉창효/ 緣知雪壓篷窓曉 봉창에 밤새 눈 쌓이고 날이 밝았는데 부재어귀지재시/ 不載漁歸只載詩 고기는 잡지 못하고 시만 싣고 돌아오네 -전문- ▣ 몇 편의 시를 싣고 돌아오시길_ 조미애/ 표현문학회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 그치고 나면 겨울바람은 더 세차게 불어올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으로 『표현』 제 85호를 발간합니다. 1930년 수인번호 '264'번이 끝내 이름이 된 이육사(李陸史, 1904-1944, 40세)는 그의 시 「강 건너간 노래」에서 "섣달..

권두언 2023.01.15

가요 중의 가요/ 고영섭

가요 중의 가요 고영섭 향가는 예로부터 '사뇌가詞腦歌'로 불렸다. '사뇌'는 '가사가 정밀하다精於詞'는 뜻意이다. 이 때문에 '사뇌가'는 '노래 중의 노래'이자, 가사 중의 가사'로 불렸다. 동시에 '시가 중의 시가'이자, '송가 중의 송가'로 불렸다. 나아가 향가는 '가요 중의 가요'로 일컬어졌다. 향가는 최고의 노래이자 가사이며, 최상의 시가이자 송가이다. 향가는 고대 동아시아의 시가 중 최정상의 가요였다. 균여(932~982, 50)대사는 의상(625~702, 77)대사의 7대 화신으로 불법을 널리 펴고자 다시 인간 세상에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뇌가'의 형식으로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소원을 담은 「원왕가願王歌」를 지었다. 그의 향가 노래와 시가 이루어지자 중국 사람들은 다투어 책을 써..

권두언 2023.01.05

상허에게 산문을 듣다(부분)/ 편집위원회

상허에게 산문을 듣다(부분) 편집위원회 1904년 철원군 묘장면에서 출생한 이태준(1904~1970, 66세)은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고난한 삶의 역경과 함께 문학적으로도 특이한 이력을 지닌 소설가이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다 부친의 별세로 함북 회령에 정착하는가 하면, 이곳에서도 어머니가 별세하자 천애 고아 신세가 되어 다시 철원으로 돌아온다. 이후 성장기인 1924년 일제에 맞서 동맹휴학을 주동하다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한다. 이곳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당시『조선문단』에 투고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아마 이때부터 그의 문학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태준의 평가는 다양하다. 한국전쟁이 있기 전 소련과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월북하는가 하면, ..

권두언 2022.12.27

행복이데올로기와 고통 피하는 사회(일부)/ 문혜원

행복이데올로기와 고통 피하는 사회 문혜원/ 문학평론가 에바 일루즈는 이처럼 행복이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된 사회를 '행복'이란 뜻의 '해피(happy)'와 '정치체제'를 뜻하는 '크라시(-cracy)의 합성어, '해피크라시((happycracy)' 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그는 '행복'이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 및 노동 현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21세기에 가장 각광받는 '행복 산업'으로서 상품 시장에 편입되었다고 비판한다. 해피크라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삶의 문제들을 개인의 차원으로 돌려놓는다는 것이다. 행복을 말하는 담론들은,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으로서 개인의 태도와 발상의 전환, 자아 개선과 자아 실현을 꼽는다. 우선은 '나 자신'으로 돌아가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살..

권두언 20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