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사랑의 메시지/ 김우종(金宇種)

검지 정숙자 2023. 1. 25. 02:18

<권두언>

 

    사랑의 메시지

 

    김우종金宇種/ 문학평론가 · 한국문인협회 고문

 

 

  창작 활동은 윤동주가 「산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허망해 보일 수도 있다. 아무리 목이 쉬도록 짖어도 저 혼자만 듣는 산울림. 이것은 이 세상에 저 혼자만 있다는 무한 고독의 확인이며 이 세상이 몽땅 귀머거리라는 뜻이다.

  쓰고 발표하는 행위가 이렇게 된다면 문학을 위한 원고지와 컴퓨터는 몽땅 쓰레기통으로···.

  쓰고 발표하는데 독자의 응답이 없는 것은 유명 작가도 마찬가지다.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감동했다는 팬레터는 매우 드물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으면 그것은 윤동주의 까치소리처럼 외딴 산속의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원고료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경우라면 부끄럽기도 하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전문-

 

   이 시는 1938년 5월 작이다. 만주 땅 남의 나라에 있다가 4월에 경성에 와서 사각모 쓰고 무궁화꽃도 보며 한창 의기양양하던 그 다음 해 『소년』지에 발표했다. 당대에는 선택된 필자만 발표가 가능했고 그는 연희전 신입생으로서 '새로운 길'을 쓰며 생기발랄 사기충천이었고, 신앙 속에서 구원을 믿던 사람이고, 민족적 또는 전 인류적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그리던 투쟁적 인물이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비관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공허한 산울림이 현실임을 인식하기에 오히려 더 절망에 맞서는 까치의 위대한 존엄성을 확인하는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응답이 없어도 계속 메아리를 울리는 까치는 바보인 셈이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바꾸고 역사는 발전해 나간다. 노력의 대가가 없는 허망한 절규라 해도 세상은 그런 긍정적 믿음과 외침에 의해서만 반성해 왔기 때문이다.

고  애초에 문학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안 울어도 되련만 날이 밝았다고 울고 해가 저문다는 우는 새처럼 그것이 절실한 욕구가 되어 분출된 것이 안네의 일기다.

  안네 프랑크는 2년 동안 창고 속에 밀폐되어 말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대화 상대도 맨날 같이 사는 꼭 같은 사람들뿐이고 외출도 못하며 내면의 목소리가 용암처럼 쌓이기만 하다가 이것이 일기로 분출된 것이다. 일기는 상상 속에서도 많은 사람과 자유롭게 말하며 내면의 소리를 정연하게 분출함으로써 자폐증에 걸리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자기 힐링의 최선의 방법이었다. 안네는 자기 아버지가 매춘부와 성관계를 한 얘기도 썼다. 그것도 내면에 쌓이면서 말하고 싶었던 소리인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해서는 안 되기에 문자로만 기록했다. 그러니까 남에게 읽히고 공감을 얻는 창작행위와 전연 다른 순수한 글쓰기다.

  이런 일기가 밖으로 공개하는 산문으로 바뀐 것이 수필이고, 운문으로 바뀐 것이 이고, 남의 일처럼 간접적 화법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 소설이다.

  이렇게 내면의 소리는 용암처럼 밖으로 분출되며 다양한 형태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문학이 자폐증 치료제만도 아니고 많은 독자에게 읽히는이상 그들을 의식해야 한다. 청자가 없는 자아의식의 독백이 아니고 청자와의 쌍방 언어생활인 이상 상대의 마음을 읽고 아픔을 읽고 상대의 말에 정중하게 귀를 기울이며 행동이 따라야 한다. 즉 가치있는 언어예술이어야 한다.

  밥을 먹으면 힘이 나지만 힘을 내기 위해서만 밥을 먹는다면 삶의 의미가 없다. 의미 없는 삶은 목표가 사라진 화살이므로  무용지물이다. 글쓰기는 더욱 확실한 삶의 의미를 지녀야 한다.

  문학은 심심풀이의 노변정담爐邊情談이어도 되고 우물가의 사다가 될 수도 있고 돈벌이가 되면 더 좋지만 문학이 종교나 학문처럼 이상을 추구하는 다른 분야와 나란히 존재 이유를 지니려면 인류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사회 기여는 옳은 일이기 때문에 문인은 문학으로 사회에 기여할 의무가 있다.

  옳은 일은 의무만이 아니라 권리가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고 불난 집의 불 끄기는 옳은 일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가능하면 사람을 건지고 불을 꺼야 하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과 권리가 있고 이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국가권력의 무능과 무책임과 횡포와 특히 전쟁 상황일수록 민주시민은 더욱 그렇다.

  문인은 문학으로 선택받은 사람이다. 사람은 저마다 천부적인 재능을 서로 주고받으며 공생한다. 문인은 타인의 가슴에 사랑의 메시지를 심어주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니까 이 역할로 지구상에서 최선을 다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 노력의 대가로 문인은 명예도 얻고 밥도 먹는다. 그런데 윤동주 「산울림」의 까치는 돈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도 목이 터지게 운다. 문학 활동이 본질적으로는 그렇다. 돈과 명예와 권세가 주목적이라면 그 재능으로 다른 일을 하는 쪽이 더남는 장사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나라 팔아먹고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로 출세하는 사람이나 그 작품들이 그렇다. 이와 달리 사랑과 연민과 정의의 분노와 희생정신이 창작 동기가 되는 이들도 있고 형태는 달라도 아름다움을 찾는 순수한 동기로 글 쓰는 작가들은 많다. 무명 작가라도 애쓰면 단 한 줄이라도 좋은 말을 남길 수 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악랄하지 않고 단 한 줄이라도 감동을 주는 글은 날개가 달린다. 그것은 길바닥 민들레처럼 하얀 깃털을 달고 먼 나라까지 날아가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며 황금빛 세상을 약속해 줄 수 있다. 아직도 인류의 역사는 슬픔이 많지만 그래도 너무도 달라진 세상을 보면 착한 민들레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못 믿어도 그 글쓰기는 해야 한다. 사랑의 메시지는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p.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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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문학』 2022-12월(646)호 <권두언> 전문

  * 김우종金宇鍾/ 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