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박제천_시낭송 축제(발췌)/ 비천 : 박제천

검지 정숙자 2023. 2. 5. 02:49

<권두언>

 

    비천

 

    박제천

 

 

  나는 종이었다. 하늘이 내게 물을 때 바람이 내게 물을 때 나는 하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괴로움을 물을 때 그의 괴로움이 되었고 그의  슬픔을 물을 때 그의  슬픔이 되었으며 그의 기쁨을 물을 때 그의 기쁨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바다였다 바다를 떠다니는 물결이었다 물결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아지랑이가 되어 바다 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바램이었다

 

  처음에 나는 하늘이었다 하늘을 흘러다니는 구름이었다 구름 속에 떠도는 물방울이었다 비가 되어 눈이 되어 땅으로 내려가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처음에 그 처음에 나는 어둠이었다 바다도 되고 하늘도 되는 어둠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움이며 미움이고 말씀이며 소리였다

 

  참으로 오랜 동안 나는 떠돌아다녔다 내 몸 속의 피와 눈물을 말렸고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추려 산과 강의 구석구석 묻어 두었고 불의 넋 물의 흐름으로만 남아 땅속에 묻힌 하늘의 소리 하늘로 올라간 땅 속의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떠돌음이여 그러나 나를 하늘도 바다도 어둠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게 하는 바람이여 하늘과 땅 사이에 나를 묶어두는 이 기묘한 넋의 힘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게 하는 이 소리의 울림이여.

   -전문(p. 24)

 

 시낭송 축제(발췌)_박제천/ 시인 ·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최근에 기분좋은 뉴스를 읽었다. 『계간문예』에서 자체 시행중인 시낭송회의 대상 수상작 원작자에게도 상금을 수여한다는 소식이다. 상금은 낭송대상자 상금의10%, 낭송자 상금이 1백만 원이니, 원작자는 10만 원. 많지 않은 돈이지만, 처음 생기는 제도다.

  2000년대 들어 전국 각 지역의 문화축제 행사에는 여흥처럼 시낭송 행사가 곁들여진다. 시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이 멋진 옷에 휘감겨 마이크를 들고 절절하게 감정을 녹여내는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한다. 마치 술자리의 트로트처럼 낭독자와  청중이 한마음이 되어 온갖 감정을 구사한다. 거기에 잔치 분위기를 묵돋는 양념이 상금이다. 참 보기 좋은 풍경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보태자면, 내 시작품 중 「비천」은 이런 시낭송대회의 단골 수상작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자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넣고 검색을 해보니, 동영상 101건이 주르르 올라온다. (p. 22)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런 현상이  마냥 좋아만 할 일은 아니다. 낭송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낭송회 진행의 플랫폼에 여기저기 자잘한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들을 하루빨리 메워 놓아야 모처럼 싹튼 시축제의 꽃봉오리들이 환한 꽃다발을 이루게 된다. 

  첫째 문제가 낭송자와 원작자의 연결이다. 또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경험을 들출 수밖에 없다. 내 작품 「비천」이 비록 수십여 건의 수상 실적을 가졌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낭독자나 주최자의 공지 통보를 받은 바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 확인 절차 없이 개인 대 개인으로 텍스트가 전전하다 본즉 훼손도가 심해져도 복원할 길이 없다. 읽기 좋게 연이나 행을 마음대로 붙였다 떼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몇 구절이 날아가도 시작품의 문맥상 쉽게 알아차릴 길이 없다. 차제에 원작자나 잡지, 출판사, 공공기관 등과 같은 유관처의 확인서가 보강되어야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비천」 전문을 게재해 둔다. (p. 23)         

  둘째 저작권법의 사문화다. 저작권법이 국내외로 시행되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과는 무관하게 또 하나의 사각지대가 형성된 셈이다. 원고료를 받기는커녕 품앗이 돈으로 발행하는 문예지가 태반인 실정에서 낭송회의 저작권료를 거두자는 발상이 아니라, 이런 기회를 활용해 주최측 공공기관이 상금과 더불어 원작료도 함께 포상하면 수상작만이라도 저작권법 사문화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일석이조가 되어  좋겠다는 건의다.

  셋째 시낭송자의 교육 일원화다. 『월간문학』 광고에도 나와 있듯이 문인협회에서도 시낭송가를 교육한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런 시낭송 기관이 꽤 많은 것 같다. 시낭송의 표준화는 지난한 일이다. 필자는 1990년대 초반 성우들과 합동으로  낭독회를 개최하면서 시인 측과 성우 측의 상반된 견해에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라 낭독회의 정상화를 위해 갖가지 방법론을 시도함으로써 공기관 중심의 표준화작업을 기획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p.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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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3-2월(648)호 <권두언>에서

  * 박제천/ 시인 ·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