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아돌하』를 내면서>
논리적 사유, 신화적 사유
임승빈/ 본지 주간
환자는 궁금한 게 많다. 혹시 큰 병이 아닐까 겁도 나고,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고 싶은데, 막상 의사는 그런 여유(?)를 허락지 않는다. 치료와 약에 대한 일방적 처방도 마찬가지다.
어지간한 대학병원의 경우, 의사 한 사람이 봐야 할 환자가 120여 명이 넘고, 의사 입장에선 언제나 너무 뻔한 질문의 반복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료장비가 최첨단이라서 굳이 문진이나 촉진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정확한 진단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로서의 C. G. 융은 달랐다. 그의 회고록 『기억 · 꿈 · 사랑』에 의하면, 문진이나 상담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정신과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자와의 대화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어떤 사소한 말이나 느낌, 하다못해 대화 중에 언뜻 스치는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까지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정신과 치료는 의사 자신의 자기 이해는 물론, 환자와 의사 모두 그 전인격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정신질환은 같은 병이라도 그 발생 원인과 치료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상담의 내용과 약물에 대한 처방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개성화個性化 individuation라는 C. G. 융의 심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도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C. G. 융이 정신과 의사이면서 동시에 심리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S. 프로이트의 영향이었다. 19살이나 어렸던 C. G. 융은 우연히 S.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고 정신과 의사로서의 꿈을 키웠고, 한때는 가장 유력한 S.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S. 프로이트 후계자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름의 독자적인 학문적 성과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학문이 깊어질수록 여러가지 측면에서 S. 프로이트의 학설에 동의할 수 없었던 C. G. 융은 그렇게 서로 달라지는 학설의 원인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을 그는 서로 다른 사유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S. 프로이트의 사유 방식은 C. R. 다윈의 『종의 기원』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반해 자의의 사유 방식은 친 외가 할 것 없이 절대적인 가정환경이었던 기독교 신화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의 기원』에 바탕을 둔 S. 프로이트의 사유 방식은 과학적이고, 또 그만큼 논리적이다. 그리고 효과적인 논리 전개를 위해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그런 만큼 주장 또한 명쾌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화에 바탕을 둔 C. G. 융의 사유 방식은 상대적으로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명쾌하게 이분법적으로 전개되지도 않는다. 이분법처럼 모티브motif가 a와 b만 있는 게 아니라, c나 d, 경우에 따라서는 e, f, g 등 무수히 많기 때문에 훨씬 다양한 맥락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다시 새로운 사유의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논리적 사유가 대상적이고 분석적이고 배제적인 디지털적 사유라면, 신화적 사유는 통합적이고 수용적이고 맥락적인 아날로그적 사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심리학이나, 실재實在Reality를 통해 새로은 창조를 구현하는 문학과 예술이 지향해야 할 사유방식은 어떤 것일까. 물리적 가치, 경제적인 교환가치가 아니라,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과 예술의 언어는 소통에 보다 효과적인 디지털 방식이어야 할까, 아니면 끝없이 새로운 상상과 사유를 촉발하는, 진정 창조적인 아날로그 방식이어야 할까.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눈길일까, 아니면 보다 다분법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맥락을 통해 언제나 끝없는 상상과 사유를 촉발하는 신화적 눈길일까.
C. G. 융의 사유 방식을 빌어 다시 한 번 우리의 사유 방식과 눈길을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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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1-봄(`58)호 <『딩아돌하』를 내면서> 전문
* 임승빈/ 본지 주간// # 제호 딩아돌하: 고려시대 사랑노래인 정석가의 첫 구절로 '정이여, 돌이여' 또는 고운 님 오시는 길에 울려 퍼지던, 정과 돌로 연주하는 악기인 편경의 맑은 소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아무 뜻 없이 소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후렴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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