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약국을 지나다
최정례(1955~2021, 66세)
왜 여기를 지나는지
왜 저 붉은 알약들을 바라보았는지
모른다
몇년 몇월 몇일 몇 시 몇 분이었는지
한 웅큼 알약을 털어 넣고
먼 싸이렌 소리를 듣던 게
예리한 칼 같은 것이 살을 베이면
베이는 순간은 통증을 모른다
늦게 불이 켜진 약국을 지난다
약병 속에는 이상한 이름의 성분들
그들이 지녔던 깨알 같던 희망도
죽어 정리되어 있으리라
무엇이라고 했던가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지나가는 것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약병들은 참 나란히도 정리되어 있었다
한참 후에야 쓰라림과 욱신거림은 온다
약국의 셔터가 내려질 시간이다
-전문-
♣ 최정례 시인이 2021년 1월 16일 별세했다. 고인은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고인은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빛그물』, 영역 시선집 『INSTANCES』 등을 펴냈다. 현대문학상, 백석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월 1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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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1-2월(3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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