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 외 1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 47세)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
책 한 권 출판되지 못하고,
내 시구들이 인쇄된 모양이 어떤 건지 보지도 못한다면
내 사정을 염려하려는 이들에게 부탁한다,
염려 말라고.
그런 일이 생겼다면, 그게 맞는 거다.
나의 시가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움은 거기 있으리.
하지만, 아름다우면서 인쇄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뿌리들이야 땅 밑에 있을 수 있어도
꽃들은 공기 중에서 그리고 눈앞에서 피는 거니까.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 아무것도 그걸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너무 일찍 죽는다면, 이 얘기를 들어다오.
나는 그저 노닐던 어린아이일 뿐이었다고.
나는 태양과 물처럼 이교도라서,
인간들만 못 가진 보편적인 종교를 가졌다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행복했고,
아무것도 찾으려 애쓰지 않았고,
설명이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이상의 설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나는 해나 비 아래 있는 것 외에는 바란 게 없었다······
해가 있을 때는 해를
비가 올 때는 비를 바라고,
(다른 것들은 전혀)
더위와 추위와 바람을 느끼길,
그리고 더 멀리 가지 않기를.
나도 한 번은 사랑을 했지, 날 사랑하리라고도 생각했지,
그러나 사랑받지는 못했지.
꼭 받아야만 하는 법은 없다는
유일한 큰 이유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지.
나는 해와 비에게로 돌아와 나를 위로했어,
집 문간에 다시 앉아서.
초원도, 결국, 사랑받는 이들한테는 그렇게 초록이 아니더라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한테만큼은.
느낀다는 것은 산만하다는 것.
(엮이지 않은 시들/ 1915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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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해지려면, 전부가 되어라"
위대해지려면, 전부가 되어라, 너의 어떤 것도
과장하거나 제외하지 말고.
매사에 모든 것이 되어라. 네 최소한의
행동에도 네 전부를 담아라.
그렇게 모든 호수마다 보름달은
반짝이지, 저 높은 곳에 살아 있으니.
(엮이지 않은 시들/ 1933년 2월 14일)
<※ 블로그주: 포르투갈어-원문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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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시인선 24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서, 2018. 10. 5. 1판 1쇄/ 2020. 1. 10. 1판 7쇄 <민음사> 펴냄
* 페르난두 페소아/ 포르투갈의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 시인. 헤럴드 블룸은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26인 가운데 셰익스피어, 괴테, 조이스, 네루다와 더불어 페르난두 페소아를 꼽는다. 일생 동안 70개를 웃도는 이명異名 및 문학적 인물들을 창조하고 독창적인 글을 썼다. 포르투갈어와 영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 및 서로 다른 문체를 구사하였으며, 시, 소설, 희곡, 평론, 산문 등 많은 글을 남겼다./ 19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소아는 일찍 친아버지를 잃고, 외교관인 새아버지와 함께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했다. 1905년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학업을 중단하였다. 일생을 마칠 때까지 '무역회사의 해외 통신원'으로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평생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다량의 산문과 시를 발표했으나, 생전에 출간한 포르투갈어 저서는 시집 『메시지』가 유일하다./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인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오랫동안 틈틈이 적은 단상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1935년 47세의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현재까지도 분류와 출판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 김한민/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리피데스에게』 『혜성을 닮은 방』 『공간의 요정』 『그림 여행을 권함』 『책섬』 『카페 림보』 『비수기의 전문가들』 『아무튼 비건』 『사뿐사뿐 따삐르』『웅고와 분홍돌고래』 등의 책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으로 페루에 파견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독일에서 작가 활동을 하다가 귀국해 계간지 『엔분의 일(n/1)』편집장으로 일했다. 포르투갈 포르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했고,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박사과정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집 『페소아와 페소아들』, 시선집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를 엮고 옮겼으며, 페소아와 그의 문학, 그리고 그가 살았던 리스본에 관한 책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의 화신』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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