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예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51)
나는 아버지 집도 없고
잃어버린 집을 가진 적도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이 세상에 낳아 놓으셨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세상 한가운데 서서,
세상 속으로 점점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내겐 나름대로의 행복과 슬픔이 있으며,
모든 행복과 슬픔을 나는 혼자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 가지의 상속자다.
나의 가문은 숲에 있는 일곱의 성城에서
세 갈래로 꽃을 피웠다.
그러다 문장紋章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너무나 오래 살은 탓이었다.
그들이 내게 남겨놓은 것과 내가 유산으로
받은 것이 이제 머물 곳이 없다.
나는 그것을 죽을 때까지
나의 손에, 나의 품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
내가 그것을
밖으로 치우면
그것은 세상 속으로 떨어져
마치 파도 위를 떠돌듯
떠다닐 테니까
▶고독과 방랑, 그리고 형상의 세계/ -릴케의 『형상시집』에 대하여(발췌)_ 김재혁/ 시인, 고려대 독문과 교수
가문의 전통에 대한 내적인 귀속감에도 불구하고 릴케는 이미 아주 젊은 시절에 그것과 결별을 고했다. 물론 이 삶의 낙오자는 분해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양친의 집은 궁색하고, 게다가 늘 불화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천성의 유약함과 예술가적 기질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를 고독한 방랑의 길로 뛰어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부족한 힘은 섬세함으로 벌충되었다. 행동과 싸움은 그의 성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의 힘은 창조적 형상력의 숭고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형상화의 힘이 그의 천성의 주요능력, 즉 한 번은 외부를 향한 바라보기와, 다른 한 번은 내면을 향한 명상과 결합함으로써 그의 작품의 두 가지 방향이 생겨났다. 그 하나는 형상적 · 구상적인 시요, 다른 한쪽은 종교적인 시이다. 『형상시집』과 『신시집』을, 후자는 『기도시집』을 말한다. (p. 시 121-122 / 론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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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2020-봄호 <다시 읽어보는 세계의 명시집( 『시사사』 2003년 3-4월호에서 재수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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