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는 것들, 타자와 자아 사이의 상상력
김윤정
근대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루어졌던 주체에 관한 논의는 자아를 이루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가 비윤리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성적 사유에 의한 주체 중심주의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원인이었지만 다른 한편 비주체들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부정적 세력이기도 하였다. 이성을 소유한 주체들에 의해 비주체들은 주변인으로서 침묵과 추종을 요구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내내 절대 권위를 지켜왔던 이성이란 특정 시대에 의해 지지되던 인간의 특정 성질에 해당한다. 그것은 사유의 일 양상이고 상태의 한 표현이다. 때문에 그것은 권장되고 양성되는 것일 뿐 인간의 존재 전체를 말해주지 못한다. 이성이라는 특정 양식에 비해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단선적인 논리로 해명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인간이 '나'라고 내세울 만한 단일하고 중심된 자아로 귀속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순수한 자아로 구성되어 있다기보다 오히려 언제나 그 무언가와 뒤섞이고 그 무언가에 의해 흔들리며 때로 해체되고 상실되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단일하고 비모순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끄러지고 헛짚으며 때로 낯설기까지 한 존재가 '나'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순수자아라기보다 타자와 혼재된 상태, 헤아릴 수 없는 타자들로 혼합되어 있는 비순수의 자아인 셈이다. (p. 156) - - - (중략)- - -
검은 새를 먹었다
검은 새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생각은 깃털보다 유용하다
검은 새의 생각이 내 중심에 연결된다
<검은 새와 나> 우리의 생각은 이제 방목이 아니다
의지에 따라 고삐를 잡는 심사와 숙고
검은 새가 잘 소화되도록
검은 새가 (어둠을 주시한 나머지) 정신분열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검은 새는 기관을 두루 갖춘 유기체가 아닌가
톱니, 칼날, 소리까지 예리한 번갯불이 아닌가
하늘 끝까지 겨냥할 수 있는 눈, 폈다하면 구만리 압축할 수 있는 날개도 염려치 않을 수 없다. 이 새가 거칠어지면 끝장이다. 모두.
누가 왜
이 검은 새를
내 안에 던졌을까?
무사히 배설될 때까지…,
길에서든 침상에서든… 검은 새…
검은 새…, 검은 새…,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유치(幼齒) 한 개를 물로 태양 속으로 날아가는 검은 새…,
그 새가 정말 검은 새일까. 그 새가 흰 새가 아니었을까. 빛에 싸이는 내가 남는다.
- 정숙자,「태양의 하트」(『현대시』, 2012. 7월호) 전문
'검은 새'를 주된 소재로 하여 쓰여지고 있는 위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검은 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의 몸속에 들어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그의 생각이 내 중심에 연결되'는 그러한 '검은 새'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검은 새'는 '내' 안에 들어와 나의 '생각'을 유도함으로써 이미 '나'의 통제와 지배권을 훨씬 웃돌고 있는 존재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즉 '검은 새'는 '나'의 외부로부터 들어온 '타자'이되, '자아'의 의식과 '의지'에 복종하고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를 압도하고 조종하는 타자이다. '검은 새'는 '나'와 분리된 채 일정한 거리 아래 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은 새'인 까닭에 그것과 '나'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다. 이처럼 '나'의 뱃속에 있는 '검은 새'는 자아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타자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존재가 이러할 경우 자아가 운위할 수 있는 폭은 최대한 협착된다. 자아는 자신의 뜻과 욕망에 따른 행위에 제한을 겪게 된다. 이러할 때 '생각은 이제 방목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타자가 자아 깊숙이 침범하여 주인 노릇을 한다면 자아는 주도적인 삶을 살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시적 자아가 '검은 새가 (어둠을 주시한 나머지) 정신분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적 자아에게 '검은 새'는 '기관을 두루 갖춘' 음험한 세력에 해당하거니와, 시적 자아가 '이 새가 거칠어지면 끝장이다' 라 말할 정도로 '검은 새'는 자아를 긴장시키는 힘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시적 자아가 '먹었다'라고 상정한 '검은 새'는 우리에게 자아와 타자 간의 보다 냉철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란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위 시의 '검은 새'처럼 자아의 몸속까지 파고들어와 그 힘을 생사하는 강력한 존재, 자아 내부에 거하는 또 다른 주체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아의 정립이 생각만큼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은 까닭이 그러한 점에 있다. 말하자면 타자란 우리들의 자아 내부에 깃들어 있는 존재로서, 오히려 그러한 곤재이기 때문에 타자가 자아에게 더묵 문제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자아는 유일무이한 절대 존재라기보다 내부에 깃든 타자와의 공동의 주체일 따름이며, 따라서 끊임없이 그와 대결하며 힘의 균형을 위해 노심초사해야 하는 존재에 해당한다. 어쩌면 이 불가항력적인 타자는 자아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운몀적 힘이 되기도 한다. 시인이 "누가 왜/ 이 검은 새를/ 내 안에 던졌을까?"라고 호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자가 자아와 구분되는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따라서 자아가 합리적인 의식을 통해 타자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간이 지니는 자아에 관한 오만한 생각과 타자에 관한 안이한 관점을 재조정하도록 한다. 자아는 이성에 의해 언제나 확고한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고 있는 자가 아니다. 자아는 많은 경우 혼돈과 갈등에 싸여 있으며 모호하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또한 자아는 순수한 존재가 아니라 타자들과 뒤섞인 우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조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성숙한 태도로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자아는 결코 타자를 배척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그 어디에서도 부여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를 둘러싼 조건들을 보다 면밀하게 살피고 있는 위의 시를 통해 우리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상력과 그들의 관계에 관해 한 시사점을 제공받을 수 있다. (p. 163~166)
* 푸른사상 평론선 18『불확정성의 시학』에서/ 2014.5.15 <푸른사상> 발행
* 김윤정/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현제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김기림과 그의 세계』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지형도』
『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학비평과 시대정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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