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성혁_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 괘종시계 : 백무산

검지 정숙자 2024. 9. 7. 17:44

 

    괘종시계

 

     백무산

 

 

  키 큰 괘종시계 하나 길게 추를 빼물고

  낡은 사무실 벽에 말뚝처럼 걸려 있다

 

  이곳에서 다방을 열었던 옛 주인이 두고 간 거라는데

  이제 그 누구도 쳐다볼 일 없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완행버스 시간표처럼

  곰팡이 얼룩진 벽을 한사코 붙들고 있다

 

  석탄난로와 함께 뜨거웠을 저 시계

  금성라디오나 진공관 전축과 함께 돌았을 시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지만 한때는

  미인의 얼굴처럼 숨 멎는 시선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다방은 읍내에서 처음 네온사인을 밝혔을 것이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누구나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달이 차고 기울고 꽃이 피고 지는 걸 보고

  닭이 울고 해가 걸리던 쪽을 보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들

  시계는 사람들을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시계는 더 많은 것들을 찾아오게 했다

  시계는 먼데 약속을 불러왔다

  버스를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도

  어디선가 가슴 뛰는 소식을 기다릴 때도

  언제나 그 얼굴의 표정을 살폈다

 

  기차만 시간에 맞춰 오가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것들은 점차 자신의 시간을 이름표처럼 달고 왔다

  새를 기다리듯 비를 기다리듯 기다리지 않았다

  얼음이 녹고 꽃이 필 때를 기다리던 사람들

 

  새로운 약속을 찾아 사람들은 떠났다

  이 낡은 시계 아래에서 더 이상 약속을 잡지 않았다

  잠긴 문 어둠 속에서 시계는 오래 혼자 있었다

  거리는 낡은 채 저물어가고 대낮인데도 인기척도 드물다

  번성하던 읍내 거리 불빛들도 꺼져갔다

  골목엔 아이들 떠드는 소리 들리지 않고

  시계는 어둠에 담겨 식어갔다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채

      -전문 『푸른사상』, 2024-봄(47)

 

  시간에 대한 시적 사유들(발췌)_이성혁/ 문학평론가

  이 시에 백무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간의 실체 역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쳐다볼 일 없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 완행버스 시간표처럼" 이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괘종시계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은 근대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시간, 즉 다방이 처음 밝힌 '네온사인'의 시간이자 '금성라디오나 진공관 전축과 함께 돌았을 시계"의 시간이다. 이 근대의 시간은 순환하는 자연을 통해 "때를 가늠하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었으며, "사람들을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가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오게" 하는 시간이었다. 나아가 "먼데 약속을 불러"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슴 뛰는 소식을 기다"리게 한 시간. 사람들은 그 괘종시계를 보면서 집단적으로 약속의 시간을 살았다. 그것이 근대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괘종시계의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새로운 약속을 찾아 사람들은 떠났"으며, "이 낡은 시계 아래에서 더 이상 약속을 잡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 것들은 점차 자신의 시간을 이름표처럼 달고 왔"으며, 이제 집단이 살아갔던 공통의 시간을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사람들은 보지 않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번성하던 읍내 거리 불빛들도 꺼져 갔"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 가득한 골목도 사라져갔다. 그리하여 괘종시계는 사무실 한 구석에 "잠긴 문 어둠 속에서 오래 혼자 있"으면서 식어갔다.

  시인은 어둠 속에 방치된 괘종시계를 시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그 시간을 환기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그 시간이 한 많은 일들은 망각의 어둠에 놓아둘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새로운 약속'의 시간인 '세상 것들'이 "이름표처럼 달고" 있는 '자신의 시간'이 지닌 협소함을, 저 괘종시계의 시간이 했던 일들을 구원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시인이 이 식어가고 있는 시계를 시화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p. 시 189-191/ 론 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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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4-여름(90)호 <계간시평> 에서

  *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만국의 노동자여』『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등

  * 이성혁/ 문학평론가,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불꽃과 트임』『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사랑은 왜 가능한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건역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