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무명시인/ 함명춘

검지 정숙자 2024. 8. 10. 02:08

 

    무명시인

 

    함명춘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려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유난히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한 장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것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전문(p.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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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4-6월(414)호 <커버스토리/ 함명춘 시인이 독자들에게 읽어 주는 시 3편 > 中에서 

  * 함명춘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무명시인』『지하철엔 해녀가 산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