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멱살에게
정호승
이제는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아도
멱살잡이하지 말고 그대로 끌려가라
도둑으로 몰려 멱살 잡혔을 때처럼
끌려가지 않으려고 앙버티지 말고
침이 튀고 단추가 떨어지고 구두 한 짝이 벗겨져도
멱살 잡힌 채로 웃으면서 끌려가라
그동안 느닷없이 멱살 잡히는 일만큼
서러운 일 또 없었으나
이리저리 멱살 잡힌 채 끌려 다니느라
눈물 또한 많았으나
이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필요는 없다
결국 시간에게
저 늙은 시간에게
오밤중에 멱살 잡혀 끌려갈 줄은 나도 몰랐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도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끌려가면
보고 싶은 어머니가 고깃국에 저녁을 차려놓고
다정히 기다리고 있지 않겠느냐
-전문(p.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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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4-여름(96)호 <신작시> 에서
* 정호승/ 1950년 경남 하동 출생-대구에서 성장,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슬픔이 기쁨에게』『외로우니까 사람이다』외 다수, 대구에 '정호승문학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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