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2
박종국
항암 혈관주사를 맞고 있는
방바닥이며 천장
나를 둘러싼 광장이
현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몽롱한 의식의 흐름만이
이리저리 나부대는
발끝에 밟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의 숨소리
살아 있는 소리
억겁의 소리 그리고 빛깔이
살살 스며드는 소리
시간을 앞질러 가는 불안 속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고
울고 웃던 지난날들이
달빛 받은 강물에 일렁이는
그 쓸쓸함같이
밤하늘 별을 헤아리게 하는
황혼의 그림자를 깔고 누운
짙고 짙은 삶,
목숨에서 우러난 목마름이
불쑥불쑥 나타나 깜박깜박하는
피리 소리 같은 샛바람 소리를 듣는
나를 받아 내는 그림자
지혜로운 어둠이 풀리고 부서지고
흩어지는 달빛 같다
사는 동안 처음 보는 달빛
보는 순간 왈칵 쏟아지는 눈물 속에
한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웃고 있는
강기슭은 봄 아지랑이에 녹아들고
구름은 한가롭게 강물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무르익은 봄날
무엇이든 거머잡고 싶은
병실에서
-전문-
해설> 한 문장: '병실'은 개인에게 찾아온 신체성의 현재적 적소謫所일 것이다. 그곳 일상은 "항암 혈관주사"나 "목숨에서 우러난 목마름" 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순간순간 "몽롱한 의식의 흐름"을 느끼지만 "발끝에 밟히는/ 목숨 있는 모든 것의 숨소리"를 "살아 있는 소리/ 억겁의 소리 그리고 빛깔이/ 살살 스며드는 소리"로 듣는 굳은 의지를 견지하고 있다. 때로 밤하늘의 별까지 헤아리게 하는 그 "짙고 짙은 삶"이야말로 "피리 소리 같은 샛바람 소리를 듣는" 순간을 가져온 궁극적 동력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사는 동안 처음 보는 달빛"을 만나면서 "왈칵 쏟아지는 눈물 속에/ 한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린다. 모든 순간이 소멸해 가는 병실에서 시인은 그 공포를 넘어 아이처럼 해맑은 봄날의 순간을 붙잡은 것이다.
베르그송(H. Bergson)에 의하면 현재는 과거를 재생하면서 다양하고 새롭게 창조되고 진화해 간다. 그는 시간의 정수는 흘러가는 것에 있으며, 그 흐름은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또한 시간은 물질, 운동, 공간을 받아들이면서 흘러가는데, 그 순수 지속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이 내재하고 공존한다고 하였다. 방종국의 시는 단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는 시간의 순수 지속 속에 존재하는 생명의 운동을 담아낸 동반자의 언어이다. 그는 이로써 자신이 써 가는 '시'가 은밀한 생명체임을 입증해 간다. 아무것도 없을 때도 존재하고, 부재의 깊은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인식 불가능의 경계선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가 바로 박종국의 시인 셈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움직임으로서, 사물의 내면에 깃들인 침묵을 포괄하고 있다. (p. 시 92-93/ 론 133 · 134)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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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무한 앞에서』에서/ 2024. 4. 25. <시작> 펴냄
* 박종국/ 199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집으로 가는 길』『하염없이 붉은 말』 『새하연 거짓말』『누가 흔들고 있을까』『숨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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