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옛말에 성공자거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이창섭/ 前 동국대 역경원장
* 옛말에 "成功者去"라는 말이 있다. 공이 이룩되면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든 생명체는 모두가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봄은 꽃을 피운 다음에는 떠나고 여름은 잎을 무성하게 한 후에는 떠나고 가을은 열매를 맺은 다음에는 떠나고 겨울은 곧 모든 식물의 죽음의 계절이다. 다음해 봄이 되면 또 다른 꽃이 피고 잎이 자라난다. 동물도 새끼가 자라나면 어미는 죽는다. 이른바 '신진대사'라고 하는 것이 이것인데 이 엄연한 자연의 법칙을 모르고 이름과 명예에 집착해서 천년만년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고 그 자리에 버티면서 떠날 줄 모르면 이른바 비참한 패배와 최후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기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육국시대 때 채택蔡澤이란 사람이 진秦나라 의 재상 응후應候를 찾아가 명예로운 은퇴를 설득한 이론의 골자가 바로 '成功者去'의 이론이었다. 응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채택의 말을 듣고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과감하게 그 세도 높고 영화로운 자리를 버리고 은퇴하여 평화하고 안온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p. 45)
* 공자는 '인仁' '충서忠恕'를 바탕으로 하여 '수신修身·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를 최고의 인간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삼강三綱 · 오륜五倫'을 건립할 필요가 있었고 풍속과 정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시전詩傳'을 편집하였고 조상과 자손 아비와 아들 임금과 신하 늙은이와 젊은이 친구사이 교우 남녀관계의 구별 부부사이의 예절을 바로잡기 위해서 '예기禮記'를 편찬하였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기록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춘추春秋'를 집필하였고 천지만물의 변화의 원리를 밝히기 위하여 '주역周易'을 펀찬하고 '상象'과 '계사전繫辭傳'을 집필하였다.
한평생 동안 공자만큼 많은 서적을 남겨 그의 사상을 몸소 전하고 실천한 성인은 없다. 비록 불교에 수많은 불경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모두가 아난阿難이 석가모니의 사후 몇 차례의 결집結集을 통해서 자신이 석가모니에게서 들은 말을 기억을 통해서 서술한 것이지 석가모니가 손수 쓴 경전은 한 권도 없다. 그러나 공자의 경우 유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구경九經 가운데 사서四書를 제외한 오경五經은 모두가 공자의 손으로 이룩된 경전이다. (※ 이 가운데 서전書傳은 후대後代의 위작僞作이라는 학설學說도 있다. (p. 58)
* 이 대자연의 순환과 사람의 삶과 죽음의 순환을 깨달은 노자는 장생불사의 길을 모색하였고 석가모니는 번뇌와 고통의 윤회輪廻에서 해탈하여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 생사의 윤회가 없는 영원한 열반涅槃의 세계인 서방정토를 꿈꾸었었다.
그러나 공자는 죽음과 삶을 엄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봉생송사奉生送死'에 예절을 다하라고 강조하였다. 공자는 한 번도 죽은 후에 하늘 위에 태어난다거나 구원한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란 일은 없다 다만 살아있을 동안에 사람이 할 도리를 다하고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규정하였을 따름이다.
공자는 한 번도 예언을 한 일이 없다. 한 제자가 "천년 후의 일을 미리 알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공자는 말하기를
"하夏가 망한 원인을 규명하면 상商나라가 일어난 이유를 알게 되고 商나라가 망한 원인을 규명하면 주周나라가 일어난 이유를 알게 된다. 이렇게 추리해 나간다면 비록 천년 후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맑스 · 엥겔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과도 흡사한 말씀이다. 한 시대의 결함과 폐단이 쌓이면 그 결함과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른 제도를 주장하는 세력이 앞의 나라를 뒤엎고 탄생하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사실에 근거를 둔 역사관인 것이다. (p. 59-60)
* 참선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여래선如來禪'이라 하고 또 하나는 '조사선祖師禪'이라 한다. 즉 한편은 시초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산雪山에서 하신 방법의 '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마대사'가 제자들을 깨우쳐준 그 방법의 '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종禪宗인 우리나라의 '조계종曹溪宗은 후자에 속한다.
'祖師禪'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간화선看話禪'이고 다른 하나는 '묵조선默照禪'이다. 즉 예전 조사들이 남긴 화두話頭를 보며 그것으로 삼매에 드는 방법과 화두를 보지 아니하고 묵묵히 마음의 바탕을 비추어보고 거기에서 삼매에 드는 방법이다.
禪宗의 '오가칠종五家七宗' 가운데 조동종曹洞宗'을 제외한 다른 네 곳의 종파는 모두 '간화선'인데 반해 조동종만은 '묵조선'이다.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그 원류가 '임제종臨濟宗'인 까닭에 물론 '간화선'이다.
문제의 핵심에서 이야기가 이탈하였는데 어쨌든 불교의 세계관 · 인생관 · 우주관은 '인과응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면 그만이다.
인과응보'라는 절대적인 원칙을 앞세워 악한 업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선한 업을 지으면 사람과 하늘세계에 태어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영구히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안락정토安樂淨土'에 태어나 수많은 부처님들과 극락세계에서 불생불멸의 열반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악의 보응의 차이를 명시함으로써 비로소 '종교宗敎'로서의 체제가 갖추어진 것이다. (p. 68)
* 도교에 있어서는 인과응보란 무의미하다. 또 후신後身이란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가상이다. 자신이 장생불사하여 죽음이란 틀에서 벗어나 동자의 얼굴로 되돌아가는데 무슨 죽은 뒤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오직 영구한 현재의 연장만이 있을 뿐 과거나 미래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도경의 어느 구절에도 과거와 미래, 인연과 보응에 관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음양의 조화 연홍鉛汞의 변화를 용호龍虎의 교구交媾 금단대정金丹大鼎의 조화에 관한 이야기만이 실려있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권력의 권좌에 오른 제왕들이 이러한 불노장생의 세계를 찾고자 희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주朱나라의 목穆왕이 팔준마八駿馬를 몰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의 신선의 궁전에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하룻밤의 사랑을 즐긴 이야기나 진시황秦始皇이 안기생安期生이란 신선을 만나 동해안의 봉래도蓬萊島라는 섬에 볼노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서 그것을 구하고자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과 함께 파견하여 불노초를 캐오라고 하였으나 한 번 떠난 배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웃지 못할 이갸기다. 중국에는 이 도교의 신도가 약 3억에 달한다고 하며 수도인 북경에도 '백운도관白雲道觀'을 비롯한 몇몇 '도관道觀'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p. 70-71)
*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묻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요강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말하기를
"식량이 충족하고 국방력이 충족되고 백성들이 이를 믿는 세 가지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다(족식足食 족병足餠 민신지民信之)"
이에 자공이 다시 물었다.
"반드시 만부득이한 사유가 있어서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식량'과 '군사력' 가운데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국방력이다."
"만부득이한 사유가 있어서 식량과 백성들의 믿음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식량이다. 무릇 임금이란 백성의 믿음 위에서만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우화는 유교가 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몸가짐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p. 74)
* 나는 육남매나 되는 많은 자식을 두었고 모두가 서울에 살고 있다. 그 가운데는 문학을 하여 시인이 된 딸*도 있고 국문학을 전공해 교사가 된 아들도 있었고(※ 지금은 요절夭折하여 없다.) 장사를 배워 무역회사를 차린 아이도 있고 고시에 합격하여 관리가 된 아들도 있고 상과대학을 나와 벤처기업의 사장이 된 아들도 있고 대기업의 샐러리맨으로 있는 사위도 있다.
이 많은 아들 딸들이 한결같이 하는 소리는 "아버지! 이제는 노령인데 일은 그만두시고 서울 집으로 올라오셔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십시오"라고 하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편한 것인지 아이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신조는 바보는 바보답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나는 시골에 내려오자 고향의 옛 친구들을 모아 '청풍회淸風會'라는 조그만 친목계를 조직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점심을 함께 하면서 세상 밖의 한담을 나누는 것이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되고 있다. (p. 135-136)
* 이경림/ 경북 문경 출생, 1989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급! 고독』외 6권,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블로그 註)
* 생각해 보면 기계문명의 발달은 끊임없는 파괴를 통한 발달의 역사였다. 무엇이든 현존하는 생산수단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수단을 탄생시킨 역사였다. 반면에 정신문화는 항상 제자리걸음만을 되풀이하였을 뿐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간 문화는 없다.
공자 · 노자 · 예수를 능가하는 어떠한 성인도 탄생하지 아니하였고 맹자 · 장자 · 순자 · 묵자 등 논리 이론가를 능가할 어떠한 이론가도 탄생하지 아니하였다. 사정은 서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칸트 · 헤겔 · 니체 · 루소를 능가할 어떠한 대철학자도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맑스 · 엥겔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 철학과 까뮈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조금 색다른 이론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상도 이미 동양에서 이천 년 전에 주장된 이론이어서 더 발전된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수레의 두 개의 바퀴 중 한쪽은 거대하게 커진 반면 다른 한쪽은 예전 그대로 남아있는 것과 같아서 수레가 기울어지고 삐걱거리고 뒤엎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p. 139-140)
* 나는 학문을 하는 것이 하늘에서 타고난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하여 대자연에 귀의하여 유연히 세상 밖에서 시끄러운 세상을 관조觀照하면서 나의 갈 길을 외길로 걸어온 사람이다. 나는 평생 동안 넉넉한 생활비조차 공급할 수 있는 돈도 벌어보지 못하였고 감투라고는 닭의 감투만한 감투도 써보지 못한 그야말로 '백두포의白頭布衣'의 바보였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는 별다른 풍파없이 흥망성쇠를 모르고 편하게 살아왔다. 아무리 가난해도 그럭저럭 끼니는 굶지 아니하였고 벌거벗고 거리를 쏘다니지도 않았다. 남의 집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나의 공간 나의 세계를 지켜왔다. 그런 까닭에 나의 마음은 항상 편하고 즐거웠다.
이제 파파늙은이가 된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나는 한평생 무슨 일을 하였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니 아무 한 일도 없다. 있다면 그저 옛 사람이 남긴 서적을 국문으로 번역한 책이 백 여 권 남아있을 뿐이다. 서글픈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후회한 일은 없다. 그렇고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비바람이 심하면 떨어지는 꽃잎도 많다. 어제까지 활짝 피었던 꽃잎도 하룻밤 사이에 떨어져 개울물 위에 떠서 정처없이 흘러간다. 부귀영화라는 것도 반짝 한 시기 피다지는 꽃잎과 같다.
하물며 시대의 비바람이 요즘처럼 심한 시대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음에랴! (p.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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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섭 著 『바보의 잠꼬대』/ 1999. 3. 22. <다인아트> 펴냄
* 이창섭李昌燮/ 1926년 경북 예천 출생,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불교 천태종 역경원장, 퇴계학회 편간위원, 한중문화교육협회 고문// 해인사_고경선림총서 37권 번역, 천태종_삼대부, 오소부 등 80권 번역, 동대 대장경중 율경 고승전 등 번역, 유교_도동편, 지행록, 반간집, 강제집 등 다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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