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의 역사 외 1편
이순주
창 밖에 산이 있다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 나는 순장되다
창문을 열면 비로소 펼쳐지는
거대한 사서의 하루
책장을 넘기는 바람의 긴 손가락들 보이고,
봄을 읽는 새소리는
아직 옷장 서랍에 봄이 들어 있다고
봄의 온도는 잘 개켜진 꽃무늬 티셔츠라고
여기는
내 손을 잡아 일으킨다
뺵빽이 꽂힌 나무들이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미래의 도서관
나는 겨울을 밀고
봄을 잡아당겨 무덤의 문을 열어젖혔다
-전문(p. 48-49)
-------------------------------------------------------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나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먼지
나의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구석은 나의 비빌 언덕,
소라게처럼 떠돌다 만난 불멸의 집 한 채
여기까지 모든 궁리가 구석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나는 구석에 앉기 위해 하루를 서둘러 집에 당도하곤 한다
나를 앓는
구석에도 감정이 있네
때로는 음악이 흐르고
그 저녁은 내가 시암 고양이 암컷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쌓인 모래를 털어놓는 시간
나의 입 틀어막으며 제 말만을 늘어놓는 연필 한 자루의,
비밀한 숲의 속삭임을 듣는
빈 커피잔은 적막을 들이마신다
영혼을 들여다보며 다듬기도 하는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구석의 마법!
내 희망은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으니
그러므로 집구석에 앉아 뭐 하는 일 있느냐고 하는 말은 구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은 시장 골목 난전에 앉아 냉이랑 달래를 파는 노인에게서 봄을 한 봉지 사 왔다 냉이된장국을 끓여 구석에게도 봄 냄새를 한껏 풍기리라
마음먹은
구석에서부터 나는 시작된다
-전문(p. 34-35)
-------------------
* 시집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에서/ 2024. 6. 5. <시산맥사> 펴냄
* 이순주/ 강원 평창 출생, 2001년『미네르바』로 등단,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 2008년 ⟪기독공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목련미용실』, 동시집『나비의 방석』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안하다 미안하다 외 1편/ 이혜선 (0) | 2024.06.11 |
---|---|
불이(不二), 식구/ 이혜선 (0) | 2024.06.11 |
잎들의 아침은 화병 속에서 걸어 나온다/ 이순주 (0) | 2024.06.10 |
반지 외 1편/ 함명춘 (0) | 2024.06.08 |
나뭇가지 길/ 함명춘 (0) | 2024.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