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불이(不二), 식구/ 이혜선

검지 정숙자 2024. 6. 11. 02:02

 

    불이不二, 식구

 

     이혜선

 

 

  개숫물 함부로 버리지 말아라

  뜨거운 물은 식혀서 버리고

  건더기 있으면 가라앉혀 버리거라

 

  해종일 밭머리 엎드렸다 돌아오신 아버지

  발갛게 익은 밀짚모자 벗어 털며

  밥상머리에서 당부하는 첫마디

 

  지렁이 굼벵이 고물고물 땅속 식구들

  그 물 받아먹고 살지러

  그 애들도 식군데

  건더기 있으면 목이 메이고

  뜨거운 물에 약한 몸 데일라

 

  논두렁 햇쑥 돋는 산자락 논배미

  모내기 하다 굽은 허리 펴는 아버지

 

  거머리 물린 종아리 문지르며

  어 씨원타,

  헌혈 한 번 자알 했으니 보나마나 올 농사는 대풍일세.

     -전문-

 

  해설> 한 문장: 작품 「불이(불이, 식구)는 시집의 제1부 첫장을 차지한 작품이다. 아마도 시인의 유년체험이고, 실제의 아버지 말씀이겠지만, 읽는 그대로 공감이 가는 우리네 참 삶의 법도이자 철리다. 미물들이 밟혀 죽을까 봐 미투리조차 발을 넓게 벌려 짰다는 옛스님들의 마음쓰임처럼 사람이 사람과 살고 사람이 벌레와 공생해야 하는 철리가 담뿍 들어 있지만 읽는 내내 구어체의 부드러운 구절들이 살갑고 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제목에 '불이'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불이'의 뜻이 무엇일까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다. 일반 시집에 비해 제목에 불교적이거나 관념적인 용어가 많이 들어간 시집이지만, 내용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기죽지 말라는 시인의 따뜻한 배려라 할 것이다.

 

     

  이혜선 시인의 새 시집이 거둔 서정적 감흥의 작품에 이어 시인이 새 시집에서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불이'로 상징화된 불교적 사유를 들여다볼 차례다. 불이는 사전적인 해석에 의하면 "현실 세계는 여러 가지 사물이 서로 대립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모두 고정되고 독립된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은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금강경』『유마경』『반야심경』『법화경』『대열반경』등 불교의 여러 경전을 비롯해 『벽암록』같은 불교 고승들의 화두집에서도 하나같이 불이를 강조한다. 이 때문에 불이는 우리나라 불교의 주류인 화엄, 선사상과 연결됨으로써 불이사상으로 명칭할 만큼 대승불교의 흐름을 관통하는 핵심사상으로 발전해 왔다.

  따라서 이혜선 시인의 작품에 나타난 불이의 세계는 불교의 이러한 연기론적 관점에서 삶과 죽음, 몸과 마음, 있음과 없음, 이것과 저것의 대립적인 실체를 하나로 융합시키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원효대사는 "둘이 아니되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一多相容不同門)고 말한다.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며(梵我不二),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自他不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生死不二)는 관점이다. 모순과 대립이 화해외 회통으로 모아지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불이사상과 한데 겹쳐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인은 종교적 관점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마치 그 묘법을 전하는 불이법문처럼 그 과정과 내용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 불교의 고승들이 득도나 절명과 같은 삶의 고비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들의 깨우침이나 소회를 게송으로 남기듯, 이혜선 시인은 우리 삶에 광활하게 펼쳐진 인드라망의 벼리를 연민으로 해석해 낸다. (p. 시 19/ 론 105-106 & 110-111) <박제천/ 시인 ·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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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새소리 택배』에서/ 제1판 1쇄 2015. 8. 25./ 제1판 2쇄 2016. 12. 5. <문학아카데미> 펴냄

* 이혜선/ 경남 함안 출생, 1980~1981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시집『神 한 마리』『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등, 저서『문학과 꿈의 변용』『이혜선의 명시산책』『New Sprouts You』(영역시집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