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반지 외 1편/ 함명춘

검지 정숙자 2024. 6. 8. 14:22

 

    반지 외 1편

 

     함명춘

 

 

  철골같이 꼿꼿하게 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에겐 한 뼘도 안 되는 보잘것없는 일이지만

  그에겐 솔깃하게 귀를 적시는 햇빛과

  바람의 가시밭으로 가득한

  천리의 사잇길이요 갈림길이다

  뼈보다도 단단하고 그 어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의지의 푸른 징을 박아넣으며

  묵묵히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엔

  그의 전 생애가 달려 있다

  옆으로 쓰러지든 앞으로 부러지든

  한번 결정되면 그것이 곧 두리번거릴 수 없는 외길이라는

  마음으로 수천 년을 살아온 대나무

 

  그래서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엔

  굵고 선명하게 빛이 나는 결속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기에게로 수백 번씩 휘둘러댄 채찍 자국과 핏방울이 맺혀 있다

      -전문(p.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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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가 되어버린 사나이

 

 

  한 사나이가 있었다 늙고 병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는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대리석으로 세워진 어느 건물의 사무원이었다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 문맥의 세월을 흐르다 지쳐 고꾸라진 한 자루의 빨간 플러스펜

  언제나 연필통처럼 빈방을 내어주는 한 채의 집이 그리웠다,

  눈감고도 갈 수 있는 사무실,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울 수 있는

  그 숱한 거리의 광고 문안과 간판들 너머 푸른 벽돌을 쌓아 올리고 잠든 하늘이

 

  그러나 그는 벽에 걸린 우리의 달력이었다

  그가 나오는 날은 평일이었고 그가 나오지 않는 날은 휴일이었다

  자신의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건물이 지어진 이래 한 번도 고장난 적이 없는 엘리베이터처럼

  한번 자리에 앉으면 그는 철제 책상보다 더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마치 드높은 제단에 제물을 바치듯 하루의 대부분을 건물에 쏟아부었다

  그의 얼마 되지 않은 한 움큼의 희망과 청춘도

 

  날마다 건물은 그의 살과 피를 빨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듯했다

  얼마 후에 그의 말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말의 발목마다 족쇄가 채워진 듯, 말이 한 벌의 옷이라면

  그는 늘 벌거벗은 채로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그의 유일한 한 벌의 옷마저 그 건물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거리로 뛰쳐나간 그가 외쳐댔다

  아, 새가 될 수 있다면 새가 되어 해바라기처럼 활짝활짝 펼쳐질 수만 있다면

 

  이후 아무도 모르게 그는 종적을 감추고

  보름도 채 그를 기다리지 못한 도시는 그의 책상을 거두어버렸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해가 바뀌던 어느 가을

  이 도시의 거리는 온통 흉물스러운 한 마리의 새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거렸다

  서툴게 튀어나온 부리와 듬성듬성 깃털이 달린 날개 밑에

  낡은 구두가 신겨진 두 다리가 매달려 있는 반인반조의 새,

  그렇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몇몇 짖궂은 아이가 그에게 돌을 던지거나 날개를 부러뜨리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방치할 수도 없는 이 도시의 매정한 관행은

  그에게 무거운 형을 선고하였다 그리하여 한 채의 감옥이 지어지고

  감옥은 오로지 그의 병든 어미만이 면회가 허락되었다

  배고픈 새끼에게 밥알을 넣어주는 그녀의 등뒤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그러나 그 어떤 감옥도 더 이상 그를 가둘 수는 없었다

  감옥 속에 더 큰 하늘을 마련한 듯이 두둥실 떠 있는 구름 사이로

  그는 푸른 깃을 치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완벽한 

  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문(p. 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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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에서/ 초판 1쇄 발행 1998. 7. 6.  2판 1쇄 발행 2023. 2. 6. <문학동네/포에지> 펴냄

함명춘/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무명시인』『지하철엔 해녀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