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다 장르를 실험한, 우리 시대의 자유로운 정신_오탁번 시인
김종회/ 문학평론가
이 인터뷰의 의의와 성격
지천芝川 오탁번 선생이 2023년 2월 14일 밤 9시에 이 세상을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갔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였고,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다. 향년 80세의 연령이기에 지금의 셈법으로는 아직 여러 해를 이 땅에 머물 때다. 그런데 안타깝고 아쉽게도 육신의 장막을 훌훌 벗어버리고 저 아득한 영면의 땅으로 옮겨 갔으니, 가까이 있던 많은 이의 가슴에 오래 남는 슬픔을 안겼다. 그러므로 선생을 기리고 그리워하며 마련한 이 가상 인터뷰는 그야말로 '영혼 인터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터뷰어로서 필자는 선생의 생전에서와 꼭 같은 어투와 발화 방식으로 질문을 드릴 터이고 예상되는 선생의 답변을 그대로 받아 적을 요량이다.
오탁번이 살아온 한 세상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지만, 선생께서 살아온 삶의 과정을 한 번 정리해 주신다면.
**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육군 중위로 군문에 입대하여 1974년까지 육군사관학교 국어과 교관을 지냈으며, 이후 4년간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모교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었습니다.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평론 등 여러 장르에 이르는 글을 썼고, 특히 1980년대 말까지는 소설에 주력하여 다수의 중· 단편을 남겼지요.
선생의 문단 이력은 여러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어떤 측면에서 그랬을까요.
** 1970년에 쓴 석사논문이 정지용 시 연구였어요. 당시만 해도 월북 문인으로서 그를 읽고 쓰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던 때라 비상非常한 용기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현대시를 말하는데 있어 정지용을 건너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이전 대학 재학 중에 1966년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다음 해인 1967년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2년 뒤 1969년 소설 「처형의 땅」이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신춘문예 3관왕'이란 이름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화제와 주목이 아니라 저 자신의 문학이 어떤 의미를 담보하며 어떻게 새 행로를 열어나갈 것이냐에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그 많은 작품들
선생께서는 여러 장르를 두루 섭렵하며 많은 작품을 남기셨는데, 이를 주요 작품 중심으로 좀 열거하여 주시면 어떨까요.
** 시집으로는 『아침의 예언』『너무도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 강』『1미터의 사랑』『벙어리 장갑』『손님』『우리 동네』『시집 보내다』 등을 떠올립니다. 물론 여기서 이 시집들에 관한 설명이니 지향점을 말하기에는 난이 비좁겠지요. 소설로는 『처형의 땅』『새와 십자가』『저녁연기』『혼례』『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순은의 아침』 등이 있습니다. 2018년에는 등단작품 「처형의 땅」을 비롯하여 절판된 창작집과 그 뒤의 발표작까지 60여 편을 묶은 『오탁번 소설』을 전 6권으로 펴냈습니다. 이 가운데 1973년의 소설 「굴뚝과 천장」은, 1972년 실종 11년 만에 발견된 고대생 사건에 충격을 받아 현실 정치에 맞서 투쟁하다가 희생된 지식인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신체제를 풍자한 「우화의 집」, 권력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비판한 「우화의 땅」, 인간의 본능적인 문제를 탐색한 「혼례」 등의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평론집과 산문집도 여러 권 상재했어요. 『현대문학 산고』『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현대시의 이해』와 『시인과 개똥참외』『오탁번 시화』『헛똑똑이의 시 읽기』『작가수업 병아리 시인』『두루마리』 등 다양한 책들의 제호題號가 눈앞을 스쳐 갑니다. 꽤 많이 읽고 썼지요.
문단 활동과 수상, 문학관
그동안 다양한 문단 활동을 해 오셨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을 드신다면···.
** 1988년 시 전문 계간지 『시안』을 창간했지요. 문예지는 보람도 크지만 또 그만큼 품이 들고 힘겹습니다. 그래도 우리 시 문학의 값있는 발표 지면을 확장하고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2020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었습니다.
수상 실적도 화려하시지요.
** 감사하게도 상을 많이 받았어요. 1987년 한국문학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문학상, 2003년 한국시인협회상, 2010년 김삿갓문학상, 2010년 은관문화훈장, 2011년 고산문학상 시 부문 대상 등입니다.
한 시대에 두 번 있기 어려운 많은 수상 실적이네요. 오랜 기간을 두고 문학의 외길로 매진해온 평가가 아닐까 합니다. 충북 제천 백운리에 있는 원서문학관을 오래 운영하셨는데···.
** 원서문학관은 저의 해묵은 꿈이기도 했지요. 고려대를 정년퇴임한 후 2003년 아내 김은자 교수와 함께, 제 모교였으나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를 매입하여 자비自費로 세운 문학관이었습니다. 제가 이승을 떠나 저승의 나라로 오면서 가장 가슴 아파하며 남겨둔 제 영혼의 족적足跡이 곧 원서문학관입니다. 거기 머물며 때로는 고독하게 또 때로는 내면의 충일을 즐거워하며 보낸 시간들은 지금도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입니다.
사후의 평가, 꼭 남길 말씀
** 저의 부고를 언론에 알린 한국시인협회 유자효 회장이 이렇게 말했더군요. "화려하게 등단한 오탁번 시인은 이후 이어진 작품에서 인생과 함께 시가 익어간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한 생애에 있어서 시와 함께 살아간, 시로 자신을 형상화한, 시로 생애를 완성시킨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그는 제가 남긴 작품을 '우리 문학계의 큰 보물'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새는 마지막에 그 울음소리가 아름답고, 사람은 마지막에 그 말이 선善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문단과 문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노년에 예술원 회원으로서 우리 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 모든 일장춘몽이더군요. 우리 문학과 문학인들이 생전에 정말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명품 한 편씩을 남기겠다는,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소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80년 세월을 함께 해주신 모든 분의 은혜에 마음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선생께서는 문학의 여러 장르를 섭렵하면서, 자유로운 예술혼을 보여주셨습니다. 문학에 대한 실제적인 생각을 담은 시 한 편을 선정해 주세요.
** 「시인학교」라는 시입니다.
소월이나 미당 생각하면
시 쓸 맛 영 안 나겠지만
재주는 좀 없어도 꾸준하게
쓰고 또 쓰다보면
내신 1등급 5% 안에는 들지 몰라
1등 2등 다툴 만한 고은이나 김춘수가
사람이다 말씀이다 하면서
3등급쯤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걸 보면
너희들
흰소리 작작하고
이슬비 맞으며 홀로 울면서
빗방울 찍어서 손바닥에라도
가련한 시 몇 줄 쓰고 또 쓰면
지용쯤은 친구 삼아도 되지 않을까?
박용래하고는 맞술 나눠도
큰 흉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신성적이 뭐 대순가
실기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거야
이 잡지 저 잡지로 너비뛰기
평론가 대학교수까지 높이뛰기
모든 욕 먹으며 오래 달리기
심시위원 알음알이 턱걸이하기
이쯤되면 소월이나 미당도
뒷발질로 넘어뜨리고
현대시사의 주동인물이 될 수도 있것다?
(학생들 와글와글 선생에게 삿대질)
안 되겠다
시인학교는
오늘
당장
문 닫는다
나는 보따리 싸겠다
네미랄
- 전문, 시집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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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3-10월(656)호 <가상 인터뷰/ p. 204~208(전문)> 에서
* 김종회/ 경남 고성 출생, 1988년『문학사상』으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저서『문학과 예술혼』『문학의 거울과 저울』『영혼의 숨겨진 보화』등, 산문집『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삶과 문학의 경계를 걷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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