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상어
나지환
필리핀 오슬롭에서 고래상어 투어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지. 펍에서 한인 아저씨를 만났는데, 자신은 고래상어를 세 마리 소유하고 있고, 네 번째 고래상어를 찾고 있다더라고. 음, 제가 보고 온 고래상어도 아저씨가 데리고 있는 애인가요? 그랬더니 아니래. 비유적인 의미라고 하더라고. 고래상어를 한 마리 가지고 있다는 건 합법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거래. 투어를 운영하거나, 기념품을 교역하거나, 뭐 좆도 아닌 동전지갑 같은 거. 두 마리 가지고 있다는 건 불법적인 일을 하고 있단 뜻이래. 한국인 대상으로 렌트카 사기 친다든가. 공장 주재원 와서 심심하니까 자재를 빼돌려 판다든가. 그리고 세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좀 더 심각한 일들. 살인 교사. 마약 도매 같은 것들. 음, 그럼 아저씨가 한 마리 더 가지고 싶다는 고래상어는 뭐죠? 그랬더니 모르겠대. 그런데 알 것 같다더라. 세 마리 가지고 있으면 이미 당국에도 로컬 깡패들한테도 찍혀 있는 상황이라 숨어 사는 거고. 지인들과는 연락 두절에 어느 섬으로 도망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모르겠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상태래. 그런데 알 것 같다더라. 네 번째 고래상어는 마지막 단계이고, 그건 이미 자신이 끝났다는 걸 이해하는 것. 알 듯 말 듯했던 죽음과의 첫 대면. 그것은 마치 휴가를 내고 필리핀에 찾아온 한국인이 수심 깊은 바다에서 눈을 뜨고 처음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래상어의 느릿느릿하고 무거운 움직임처럼, 세상 끝 바다의 끝장에 이미 존재했던 거대한 존재감. 아저씨는 펍을 나와 집에 돌아갔을 거고, 오늘 습격당하지는 않았겠지만, 흰 칼라추치가 일렁이는 바다는 숲 같고 숲은 안개 같고. 소금 안개 밑바닥에서 이미 오래전에 태어나 몸집을 불린 네 번째 고래상어가,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때부터는 자신이 옮겨다닌 여섯 개의 섬을 단 하나의 섬으로 생각하고, 타오르는 그 섬을 흰빛으로만 여기겠다고 약속해. 술을 많이 마시게 돼. 기약된 여름을 들고 꿈속을 헤매. 그걸 건네줘야만 할 것 같거든. 항아리에서 떠오르는 잎을 건네주려고. 벌레의 몸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흰 구름을 건네주려고. 해변의 모래가 먼 산 하나를 다 덮어버릴 때까지, 그는 성북구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리고. 여름 속에서 태어난 두 자식의 보이지 않는 꿈이, 두 자식 각자의 시선이 이곳으로 찾아와 수평지평선을 조각낼 때, 이미 해변만이 그의 전 세계였다. 흰 칼라추치가 일렁이는 태양에 대하여, 수정이 가둔 삶의 투명한 비린내에 대하여, 채석장에서 올려다보던 광활한 공중에 대하여. 그의 친구였던 알렉한드로가 읊조리면, 그는 가만히 술을 마시고, 알렉한드로가 집으로 간 뒤에도, 추억 속에서 한번 전개된 푸른 하늘은 좀처럼 접히지 않고, 자신은 아직도 그 위를 달리고 있다며, 섬의 도로를 이어 내는 거지. 지난밤을 향해 이어지는 거지. 바다를 이해하는 거지. 그건 삶을 버리는 것. 파도를 망각하겠다고, 어선을 잃어버리겠다고, 석양수평선을 되돌려주겠다고, 이로써 되살아나고 싶다며, 집에 돌아간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진정하려 했지만, 이미 환각하는 바닷가 마을은 164차선 도로로 펼쳐지고, 컨테이너선을 이고 수영하던 다이버들이 허공에서 폭발하고, 모래를 먹기 시작한 지 세 시간 만에 해안선을 통째로 집어삼킨 개미들이 그의 눈동자를 갉아 먹는 시간. 거기에 드러나던 그의 여권 사진, 그의 얼굴, 흰 칼라추치가 쏟아지던 물 그늘. 흰빛으로만 세상이 약속될 때. 소금 바닥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열대림에 쌓이던 성북구의 눈발들 너머, 어느새 제법 몸집이 커진 고래상어 한 마리가 그를 향해 헤엄쳐 오고······
-전문(p. 17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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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3-가을(30)호 <poem> 에서
* 나지환/ 2023년 『계간 파란』으로 시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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