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
이영란
비 오는 날 나무 밑은 예민하다
불규칙 파동이 섞이는 물 고인 곳엔
희끗히끗 나무 그늘 밖의 하늘도 보이지만
불규칙도 한참을 지나면 규칙적인 소리가 된다
젖은 나뭇잎들엔 빗물이 달라붙어 있고
나무의 대기권을 거친 빗방울들이
굵게 뭉쳐져서 떨어진다
어느 슬하라도 궂은 날엔 다 예민하다
말 없는 곳의 파동들이
비 내리는 한나절을 끌고 가듯
한 슬하의 투정들도 눅눅한 가장의
파동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이란 결국 모두 같은 맥락이다
예민한 순간들이 멈칫거리며 무뎌지는 일
막다른 곳에 다다른 빗줄기가
수많은 파문波紋을 찍어내듯
슬하엔 들고 나는 발자국들이 많다
네모난 빗방울은 없겠지
동그라미는 하나로 만나는 높은 곳의 한낮
가장 높은 곳의 일들이란 가장
낮은 곳의 파동이 되는 것이다
그런 풍경을 오도 가도 못하는 비의
중간에서 오래 바라볼 때가 있다
파동은 가장 짧은 시간을 증명해 보이지만
모두 동그랗게 완성을 끝내는 일들이라면
지나간 일들은 다 빠르다
-전문(p.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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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회 『미래 서정』(제12호) 에서/ 2023. 12. 29. <서정시학> 펴냄
* 이영란/ 2015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시집『망와의 귀면을 쓰고 오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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