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사람
유희선
제발,
지난밤의 모든 역을 함께 통과한 듯
민낯을 보여주지 않기를
막무가내인 그녀는, 고무줄 같은 궤도를 탱탱하게 늘이고 있다
나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자꾸 발이 빠진다
다크써클이 사라지고 주근깨처럼 박힌 점들이 순식간에 행방을 감춘다. 거울을 바짝 대고 눈썹을 공들여 그린다. 오른쪽 왼쪽 최대한 평행으로
전철은 내달리고
컬링 집게로 속눈썹까지 바짝 말아 올린다
지금쯤 어느 환풍구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솟구쳐 오르고 있겠지
누군가 부푼 치맛자락을 지그시 누르며 지나갈 동안
그녀는 마스카라를 두껍게 칠하고 있다
안국역에서 광화문역 사이에서는 루주를, 드디어 그녀의 아침은 붉게 밝아오고
나는, 나의
민낯과
누드가 아름다웠던 때를 아득히 떠올린다
야금야금 허리둘레가 늘어나는 순환 전철 안에서
밀도를 높이는 끈끈한 친밀감, 그녀의 화장은 끝나지 않고
점점 속도를 높이는 더 먼 곳의 생각들
어제는 여섯 잔의 커피를 마셨고
아직 커피나무를 본 적 없다는 느닷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는 재빠른 볼 터치로 궤도 바깥으로 튕겨 나간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
곧 지나갈 사람들의
무심한 폭력
민낯이라는 무기로 그렇게 왔다 갔던 사람이 있었다
커피나무는 너무 먼 곳에 있고
민낯이 더 두껍고 무례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을 때였다
커피나무를 상상하지 않는
커피 한 잔처럼
그녀의 민낯을 보지 못한 오늘의 그 누군가가 위대해 보인다
-전문(p. 61-63)
♣ 시작노트> 한 문장: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에서 특히, 에곤 실레와 프리다 칼로는 거울에 관한 이야기가 각별하다. 에곤 실레는 엄마의 전신거울을 훔쳐 나와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프리다 칼로는 사고를 당해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엎개가 있던 침대 천장에 거울을 고정하고 부서진 자기 자신의 모습을 주시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죽음을 맞이하기 수년 전에는 더욱더 거울에 집착했다. 온 집안이 거울로 둘러싸여 지낼 정도였다. 그들의 실제 상황과 무의식을 반영하는 거울과 예술 작품 사이의 거리는 작가의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에곤 실레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왜곡된 부분이 강조되었지만, 드러나는 효과는 극과 극의 대척점에 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나르시시즘적 요소나 극단의 자기 혐오적인 모습 등등··· 어쩌면 그들의 기질을 용기 있게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하면서, 또한 그들의 생애를 책을 통해 알아가면서 어떤 영감이 섬광처럼 스쳐 간다. 예술의 놀라운 힘, 바로 영혼과 영혼이 소통하며 상상하게 한다. 내가 그가 되는 순간이다. 더더구나 스페인 독감으로 31살에 요절한 에곤 실레, 소용돌이치던 그의 행적은 바람 앞 촛불처럼 맥없이 스러졌다. 그가 남긴 도도한 자화상들은 너무 젊어서 슬프다.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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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8월(404)호 <신작특집> 에서
* 유희선/ 2011년 『시사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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