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지구본
김건희
남극과 북극을 빙빙 돌린다
자유로운 영혼일수록 침이 고이고
껍질은 오래전부터 탈출을 꿈꾸었을 것
귀퉁이 쪼그라든 오렌지
살빛 다른 이들에게 한 쪽씩 나누어졌을 것
꽃을 꺾은 자에게 손을 모은 바라나시*가
전설보다 더 오래 산다 해도
어찌 오렌지 역사만큼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끝이 보이지 않던 갈림길에서 달려 나온 바퀴는
바빌론에서 풀려나온 눈빛이다
눈 감고 입을 열어 과즙 한 입 삼키면
쓴맛 단맛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껍질 잃은 알맹이가 초라하다지만
어느 낯선 접시별에 툭 던져진다면
오렌지 아닌 다른 이름이어도 좋다
내일은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
* 인도 북부의 도시
해설> 한 문장: 사회적인 인식을 가진 시인은 오렌지라는 작고 단순한 사물에서 큰 의미를 끄집어낸다. 이러한 통찰력은 세계사의 역사는 인종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그 외 여러 가지 문제에서 오는 쓴맛과 단맛도 있을 것이다. 오렌지에 대한 사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렌지를 던진다. 오렌지가 던져진 공간은 "접시별"이다. 사실적인 오렌지를 받을 곳은 접시이지만 상징적인 오랜지를 받을 곳이 별일진대 두 곳이 합성이 되어 접시별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현상학적으로 판단이 중지된 오렌지는 지구본이라는 실체로 환원이 되어 새롭게 출현한다. 지구본이라는 상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주에 있는 별까지 달려간다. 공간은 깊이와 넓이로 측정하는데 지구에서 우주의 별까지 거리는 얼마나 깊으며, 공간의 넓이는 얼마나 넓은가.
화자가 껍질 잃은 알맹이를 어느 낯선 접시별에 던지고자 한 동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꽃을 꺾은 자에게 손은 모은 바라나시 사람들의 관습이나 행위에 대한 분노와 반성의 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반성적 행위가 시간적 흐름을 의식하며, 작품의 특성이 시간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오렌지에서 유추한 시인의 상상력은 현실과 가상, 꿈과 무의식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으로 표현하여 의미망을 확산하고 있다. (p. 시 20-21/ 론 126-127) <이구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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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오렌지 낯선 별에 던져진다면』에서/ 2024. 3. 11. <상상인> 펴냄
* 김건희/ 2018년 『미당문학』신인작품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두근두근 캥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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