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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작가(無名作家)/ 심보선

무명작가無名作家 심보선 내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종이 깨지는 소리와 현이 끊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펜이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나는 죽음이 야적野積돼 있는 들판이 어디인지 모른다 천재들은 알지도 모르지 나는 천상天上에 아로새겨진 천성天性을 본 적이 없다 천재들은 봤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대충 쓰지 않을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첫 번째 걸작을 서둘러야지 헌사獻詞 따위는 없다 그러나 결국 나는 바치겠지 내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모든 독자들과 존경하는 비평가들에게 -전문(p. 109)// 『다층』 2009-여름(42)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울(100)호 에서 *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불수의적 정체(停滯)/ 전형철

불수의적 정체停滯 전형철 1. 먼 대양에서 길어 올린 전갱이며 고등어들이 골목에 싱싱하다 2. 지나간 사랑에게 일련번호를 매길 때 빗방울은 다른 굴절률을 지닌 렌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이, 우리가 잃어버린 우산들은 어느 하늘에 별자리가 되었던가 뭇별은 구름 위에 문신을 새기고 웅덩이는 다시 구름의 지도를 지상에 부려 놓는다 3. 바람이 나무의 깃을 붙들다 놓쳐 버린다 늑대인간은 핏빛 보름달에 광란하고 정체는 비린내에 발작한다 눈자위가 눅눅하다 -전문(p. 110-111)// 『다층』 2009-여름(42)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울(100)호 에서 * 전형철/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고요가 아니다』『이름 이후의 사람』

겨울 강 외 1편/ 송병숙

겨울 강 외 1편 송병숙 강이 운다 소나무껍질같이 더께 진 울음을 목젖까지 끌어 올리며 운다 천둥 치듯 휘몰아치는 저 거친 신음소리 캄캄하게 주저앉은 산도 서릿발 선 제 슬픔을 들여다본다 사람과 사람 사이 건너지른 빗장에도 녹지 않는 얼음동굴이 있어 어떤 조각은 깎일수록 날카로운 흠집을 내고 어떤 조각은 공중제비를 돌다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한번 얼어붙은 사이는 쉬 풀리지 않아 석 달 열흘 제 몸을 얼리고 조이며 해묵은 찌꺼기를 쩡쩡 걸러내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녹을 때까지 강판 같은 어둠을 들썩이는 것이다 -전문(p. 68) -------- 연鳶 구멍도 겹치면 길이 된다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주저앉은 연은 한낱 종이짝에 불과했다 길을 꿈꾸는 날개들의 뒤척임 사립문처럼 드나들던 구멍에 바람이 인다 겹..

및/ 송병숙

및 송병숙 어둠 속에 섬처럼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제 할 일 다 하고도 사라지거나 다가오지 못하는 조각조각 부서지는 영상을 본다 디지로그 속 낭만적 거짓 세상에서 '및'이 조각들과 나란히 걸어간다 갓난아기를 업듯 가진 무게를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걸치고 나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및' 사이가 돈독해진 이웃들이 이웃을 부른다 그리고, 또, 그밖에 뛰어내린 햇살이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네를 타듯 한 덩어리로 출렁이는 끈끈한 적수들 오늘도 독립을 꿈꾸는 '및'이 모 씨와 모 씨에게 지친 어깨를 내주고 있다 그러고도, 그러지 않고도 싶은 저녁 어느 하나를 선택하거나 버리지 않아도 되는 대체 공휴일 같은 평화주의자가 결단을 유보한 채 건들거리며 걸어간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의 첫머리에 ..

잘살고 못사는 게/ 장호병(수필가)

잘살고 못사는 게 장호병/ 수필가 말은 살아 숨 쉬는 생물이다. 어제까지 입 안의 혀와 함께 뒹굴던 말도 환경이 바뀌어 상대해주지 않으면 온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더러는 세상이 바뀌어도 그냥 붙박이로 눌러붙어 우리 삶의 잣대 역할을 한다. "먹고 사는 건 걱정 안 해도 된다네." " 살 집은 있단다." 한때 딸 가진 어머니들에겐 귀가 솔깃했던 말이다. 이를 눈치챈 매파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신랑감의 능력을 한껏 부풀렸다. 양쪽이 만족스럽게 성사되면 술이 석 잔이지만 자칫 잘못 엮으면 뺨이 석 대이다. 뻥을 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도 일단 연을 맺으면 무를 수도 없는 일이 혼사이다. 세상사 뜻대로만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어미도 딸도 '잘살고 못사는 건 팔자'라 위안하며 살았으리라. 이 말이 ..

권두언 2024.01.12

밤바다는/ 정연덕

밤바다는 정연덕 밤바다는 꿈을 먹고 산다 눈웃음으로 노래한다 허리를 흔들며 번득이며 행간을 오른다 밤바다는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의 나팔을 분다 목쉰 아우성에 질펀한 눈꽃처럼 피어난다 스물세 살 청상으로 역사의 결단과 마주한다 -전문(p. 48) *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 多石 유영모(교육자, 종교인 1890~1981, 향년 91세) 선생의 어록에서. 경신학교, 양평학교, 오산학교 졸업 및 오산학교 교장 역임. ---------------------------- * 『월간문학』 2023-11월(657)호 에서 * 정연덕/ 충북 충주 출생, 『시문학』추천 완료(1976.3.~77.1.)로 등단, 시집 『달래江』『블랙홀에 뜨는 노래』등

지워져 가는 발걸음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고경자

지워져 가는 발걸음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고경자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밀고 당기며 어둠이 만지고 간 계단 위로 머리만 둥둥 떠다닌다. 독존의식이 강한 머리와 가벼운 머리 정서가 비통한 머리들 암호처럼 일렁이며 수많은 머리들이 숲을 이루어 계단을 오른다. 통제 잃은 자아 상실한 발 하나 꿈틀거리는 계단을 구른다. 하얗게 질린 어둠의 눈썹에 내려앉아 우주의 숨결을 불어 넣고 해마는 의식의 끈을 붙잡아 심폐소생술을 하네. 흐려지는 의식이 구름계단을 밟고 어둠의 중간쯤을 걸어간다. 스쳐가는 교차로도 없는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세상에서 하나씩 지워져 가는 발걸음 그는 기억하지 않는다. -전문(p. 69-70) ---------------------------- * 『월간문학』 2023-11월(657)호 에서 *..

암흑 물질 외 1편/ 김신용

암흑 물질 외 1편 김신용 어깨에 헌 포대를 걸친 사내가 걸어온다. 그는 쓰레기통 근처를 서성이며 빈 병이며 갖가지 고물들을 주워 헌 포대에 담는다. 아직 공사판 같은 데서 잡일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 같은데도 어디 병색이 있는지 야위고 지친 낯빛으로, 그 빈 병 따위가 담긴 헌 포대를 어깨에 걸치고 발밑만 내려다보며 걷는다. 누가 쳐다보건 말건 그 표정 그 시선으로 걷는다. 가만가만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없는 듯 자신은 모든 것의 바깥에 있는 듯 걷는다. 미명인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내, 그가 어디에서 기거하는지 딸린 식구들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말없이 그저 묵묵히 제 발끝만 내려다보며 혹시 쓰레기통 곁에 빈 병이라도 있는지, 호구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13/ 김신용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13 김신용 가시可視가, 가시 같은 날이 있다. 참 낯선 풍경을 보는 날이다. 낯선 풍경이라지만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은 날이다. 서울역 광장 한편에 작은 제단이 차려지고 향이 피어오른다. 역 지하도에서 광장의 구석진 곳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간 노숙의 넋들을 위한 위령제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가시 같다. 가시可視가, 가시 같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들 , 살아서 이미 죽은 사람들 , 얼굴이 없는 얼굴들 , 눈앞에 마치 얼룩처럼 떠오른다. 눈에 박힌 비문飛蚊처럼 떠오른다. 저것도 빈곤 포르노 같다고 해야 하나? 자신의 불행을 과장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던 사람들 , 흑백으로 남겨진 초라한 몇몇 영정 사진도 보인다. 눈앞이 흐릿해진다. 위태로운 벼랑에서의 삶들 , 그 비..

먼지화엄경/ 강영은

먼지화엄경 강영은 섣달 그믐날, 총체를 들고 먼지를 턴다. 하나로 묶인 말꼬리 속, 유리창의 투명 얼굴이 털려나가고 책갈피의 자음과 모음이 털려 나가고 피아노의 흑백 계단이 털려 나가고 커튼 자락 주름 잡힌 고뇌가 털려 나가고 냉장고 위 두껍게 쌓인 침묵이 털려 나간다. 햇빛 속, 보이지 않던 세상이 화엄을 이룬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먼지화엄경을 다시 읽는다. 나를 이루고 있는 접속사와 감탄 부호, 수납장 속의 바퀴벌레처럼 먼지로 남아 있는 모든 것, 내가 이름 지은 거머리별과 이름을 갖고 싶어 하는 뭇별들, 진화 중인 먼지까지 모조리 품고 있는 비로나자불의 구름바다 속, 나는 총체적인 먼지다 -전문(p. 107)// 『다층』 2009-봄(24)호 수록作 --------------------- * 『다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