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論 외 1편
한영숙
퍼붓던 지난겨울 눈들이
하늘의 바닥이었다는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그 두꺼운 밑바닥을 다 쓸어내고 나면
뻥 뚫린 파란 구멍이 보였어
얼굴 깊이 묻고 엎드려 소리치면
빈 항아리 울음소리 같은 게 웅웅 귓전을 때렸어
하늘이 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누군가에게 속을 내보인다는 것
갈비뼈 한 대 뚝 떼어준 시린 옆구리 같았을.
새 발짝 하나 찍히지 않은 흰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누군가 들뜬 마음으로 환호를 질러댔어
또다시 눈이 내렸어
하늘 바닥은 어느새 콱 막혀 있었어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거리와 골목은 눈 천지로 푹신거렸어
사람들도 슬슬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어
나도 어느 틈에 눈으로 뭉쳐진 돌멩이가 되어 있었어
자동차도 아파트도 거대한 흰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어
그들은 두꺼운 바닥을 더욱더 견고하게 다지고
이제 저 속은 더욱더 깊어졌어
하늘을 삽질할 때마다 삽날에 돌멩이가 걸려 나왔어
나도 걸려 나오고
내 아는 누군가도 삽날에 이마가 찍혔어
이젠 쟁글쟁글한 하늘이라고,
그런데 그 두꺼운 바닥이 지금 새고 있어
점점 침몰하는 중이야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
-전문(p. 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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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camel)이 낙타의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
1)
레드마을 중턱, 집채만 한 바위로 중무장한 하스타네*
어느 돌장이가 군부와 귀족을 피해
속 꽉 찬 천리만길 돌덩이에 제 혼과 살을 섞어 뼈대를 만들었나.
어느 석수장이 釘으로 쪼고 石으로 쪼아
엄지 검지 함부로덤부로 짓이겨가며 비릿한 석굴을 팠나.
치료실 벽면에 덧발라진 무뎌진 상처들을 보며
긴긴 안부를 어루만진다.
굉음의 드레를 홀연히 붙견뎠을 쌍봉낙타 한 마리,
가료加療차 들렀을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리는지
'열려라 참깨' 주문呪文을 외듯 병원 앞 웅크리고 있다.
호젓한 햇살 한 줌 바람 한 줌 고슴도치 등짝만 한 석창으로
병실 안 텅 빈 공음 주거니 받거니 구석차기질이다.
붉은 이암茸巖 바람은 버섯바위 기둥 깎이도록 휘몰아쳤을,
갑자기 명치끝 체기가 훅 뭉쳐왔다.
관광객 좌판대 도열하듯 놓여 있는 즉석 석류즙을
까스활명수처럼 연거푸 들이켰다.
푸른 혈관이 긴 시간 넘나들며 막힌 혈전을 뚫어내고 있다.
어느 박해받은 기독교인이 예까지 다리 끌며 피신 왔을까.
그는 누추한 빈민들을 구제하는 수도자였을까
난 하염없이 망부석이 된 그의 임자가 될 수는 없을까
코뚜레 꿰어올 수는 없을까
2)
종일 골몰한 생각에 잠기며
호텔, 구석진 객실 앞에서 유행이 한참 지난 열쇠로
이리저리 돌려도 도무지 열리지 않는,
명치끝은 더욱더 옹골져 오고
호텔리어 올 동안 컴컴한 창턱에 걸터앉다 문득 반짝이는 물체를 보았다.
한쪽 귀퉁이 떨어져나간 아주 작은 바늘이었다.
간밤 L시인이 체했다고 찾아왔을 때
궁여지책 굵은 옷핀으로 따려고 하자 식겁똥을 쌌던.
나는 불현듯 하스테네 앞 웅크린 그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L시인이 창백한 얼굴로
내일 카파도키아 애드벌룬 탈 생각에 애써 찾아왔다는,
그녀의 등짝을 세차게 두드리며 차갑게 식은 사관四關에
슬쩍 콧김을 쐬어 바늘로 주문을 왼다.
아스피린 처방받은 관상동맥 환자 시원하게 뚫리듯
귀耳퉁이 꽉 막힌 석문石文이 렌티시모(Ientissimo)로 열리고.
-전문(p. 24-26)
* 수도자들이 진료하는 석굴로 된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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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카멜이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에서/ 2024. 1. 30. <여우난골> 펴냄
* 한영숙/ 2004년 『문학 선』으로 등단, 시집 『푸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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