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보호자/ 이기리

검지 정숙자 2023. 10. 26. 07:52

 

    보호자

 

     이기리

 

 

  어느 봄날

  정신이 칼날에 박혀 흐물거리고 있을 때

  지하철 문이 열리자 객실 한가운데 서 있던 나를

  전동 휠체어가 뒤에서 전속력으로 박아

  두 무릎이 완전히 접히며 쓰러졌다

 

  외투에는 먼지가 잔뜩 묻었고

  쓰고 있던 안경도 절반쯤 벗겨져

  한쪽은 흐릿하고 한쪽은 분명했다

 

  극도로 불쾌해진 나는 뒤돌아보며

  그에게 무슨 짓이냐고 말을 쏘아붙였으나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는 듯한 태도가 더욱 괘씸해서

  당장 사과하라고 말을 이어나갈수록

  그는 더 깊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이내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숙였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짓는 불쌍한 표정과

  내가 높인 언성을 번갈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아 나를 무슨 흡사 약자를 괴롭히는

  불한당의 일원으로 여기는 듯한 여론에

  그만 입을 다물어야만 했고

  마침 내릴 역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자마자

  허겁지겁 내렸다

 

  병동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절대로 망할 일은 없겠어

  그중에는 휠체어를 끄는 이들도 많았고

  하얀 복도를 건너 채광 밝은 자리에서

  진료를 기다렸다

 

  우리 언제까지 여기 와야 할까요

  내가 물었지만

  그는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전문-

 

   시론 에세이> 한 문장: 요즘 나의 작업은 '보호자'를 화두로 삼는다. '보호자'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삼아 쓰는 시가 늘어나고 있고 제목을 변형하더라도 '보호'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삼아 바꾼다. 이 작업이 단순한 반복으로 그치지 않게 되었을 때, 이 글을 떠올려야겠다. 나는 보호를 삭제하기 위해 보호자가 되었다.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 곁에서 고통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병을 깨끗이 지우고 싶다. 마침내 병이 남겼던 기록을 모두 삭제했을 때 남는 것은 보호하는 마음과 노력뿐이었으면 한다. 머리맡에 자리끼를 올려두고 따뜻한 물수건을 이마에 덮었던 밤, 약봉지를 뜯어주고 약을 꺼내 먹이고 쓰레기통에 봉지를 버려주었던 나날. (p. 시 50-51/ 론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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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사』 2023-여름(114)호 <미래를 열어가는 시인/ 자선 대표시> 에서

 * 이기리/ 시인, 2020년 제39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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