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 다니는 일▼
민왕기
요즘 뭐 하며 지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저 문병 다닌다고 한다
병이 온 첫날엔 참이슬 서른 잔으로 안부를 물었고
일주일 되던 날엔 맥주 두 병으로 문안을 했다
달포가 지났을 땐 맥주 서너 병으로 인사를 다녀오고
무슨 병인지 모를 만큼 시일이 지났을 땐 술 석 잔 붓고 말았지만
오랜 병을 구하려는 일도 줄어 가끔 맥주 한 병 사다가
입술에 닿는 거품들을 후루룩 소리내어 들이켜 보기도 한다
사람 만나러 가는 길이 이제 다 지인들 문병 가는 일이다
아파 보이는 사람이나 아파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모두
소주나 막걸리 같은 것을 놓고 앉아서 제 속에 술 털어 넣는일
그저 산책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밥 한 번 먹자는 말도 모르는 병을 서로 조용히 묻자는 이야기다
-전문(p.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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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 2023-여름(114)호 <이 계절의 신작시 2> 에서
* 민왕기/ 2015년 『시인동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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