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 김상미 까치밥 김상미 그를 끊고 그녀를 끊고 늘 울리던 전화를 끊고 애매모호한 정체성 신문을 끊고 쓸데없이 히죽히죽 웃던 존재의 헛발질을 끊고 굶주린 늑대처럼 포효하는 욕망을 끊고 즐겨 따라 마시던 칸노 요코의 카우보이 비밥을 끊고 겨울 내내 허허벌판에서 기다리던 봄기차를 끊고 한밤중에 일어..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9
날아라, 탁자/ 장이엽 날아라, 탁자 장이엽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시시포스가 있었다. 머물지 못하는 건 운명이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가속을 붙인 무게는 다시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일은 그에게만 선고된 형벌이 아니다 바닥에 엎드려 네 귀를 세우는 탁자야! 엿듣지 마..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8
기러기/ 강태열 기러기 강태열 전쟁을 알 리 없는 눈이 내리다가, 눈 개인 하늘이 빈다. 장독대엔 흰옷 입은 옹기들뿐, 끼륵끼륵 끼륵끼륵 하늘 나는 기러기……. 빈 장독대도 기러기 소릴 낸다. 전쟁을 알 리 없는 눈이 쌓인다. “얼마 전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찻집 ‘귀천(歸天)’이 고(故)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7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 김승희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 김승희 결국 모든 시의 제목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는 이상은 그렇게 위독의 문학을 했다,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고, 김유정도, 카프카도 그런 위독의 문학을 했다, 폭설이 가혹해지면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과 패쇄의 자리가 된다, 나가지도 들..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6
移住의 저녁/ 이은경 移住의 저녁 이은경 사람들보다 먼저 이사를 온, 키 큰 나무들이 길 건너 아파트 신축 부지에 길게 누워 있다 이주의 첫 저녁이 오고, 설렘과 불안이 뒤엉킨 나무의 잎사귀들이 저녁의 무늬에 스민다 귀란 귀를 모두 열어 놓고 눈을 감으면, 베고 누운 손바닥의 손금 사이로 땅 밑의 숨소리들이 올라온..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5
가죽 방패/ 김백겸 가죽 방패 김백겸 항공사진에서 내가 사는 도시를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미로세계에 갇힌 쥐였습니다 숲을 벗어나지 못하는 호랑이였고 책상 위를 기어가고 있는 무당벌 레였습니다 책상의 끝이 천 길 낭떠러지임을 모르는 채 먹이를 찾아 망상의 독을 안고 걸어가는 사막의 전갈이었습니다 독이 조..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4
만년필/ 송찬호 만년필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3
사과나무, 푸른 가계(家系)를 읽다/ 이영식 사과나무, 푸른 가계(家系)를 읽다 이영식 과수원길 걷는다 사과나무가 산모처럼 부풀어 푸른 가계를 이루고 있다 바람이 가지를 당겼다 놓을 때마다 사과나무를 어깨를 낮추어 어린 사과의 옹알이를 달랜다 불청객이 그늘로 바짝 다가서자 조심하세요 수유(授乳)중입니다 곁가지가 내 입술에 손가락..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2
케추아어에 갇히다/ 김영찬 케추아어에 갇히다 김영찬 나는 쓸데없이 케추아어를 배워야겠다 무용지물 미궁에 빠진 케추아어 문법을 우루밤바 계곡 우르르 천둥치는 물길에 쏟아 통음해야겠다 결승문자 하나 흔적 없이 그런데 잉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절을 찾는다 새들이 기를 쓰고 페루에 가서 ..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2.02
우체부(등단작)/ 박효열 우체부 박효열 우체부가 찾아오듯 산동네에 봄이 와요 꼬끼요 낮닭 울듯 벚꽃이 피었어요 까치가 울어대는데 누가 또 오시려나. 군대 간 아들놈의 기별인가 싶어서 숨겨둔 막걸리를 한 사발 들고 간다 여름밤 소나기처럼 시원스레 와 다오. *『시조생활』여름호, 등단작 * 박효열/ 전남 순천 출생,『시.. 잡지에서 읽은 시 2011.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