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까치밥/ 김상미

검지 정숙자 2011. 2. 9. 01:10


    까치밥


    김상미



  그를 끊고 그녀를 끊고 늘 울리던 전화를 끊고 애매모호한 정체성 신문을 끊고 쓸데없이 히죽히죽 웃던 존재의 헛발질을 끊고 굶주린 늑대처럼 포효하는 욕망을 끊고 즐겨 따라 마시던 칸노 요코의 카우보이 비밥을 끊고 겨울 내내 허허벌판에서 기다리던 봄기차를 끊고 한밤중에 일어나 바다를 향해 달음질치던 절박한 발길을 끊고 날마다 세상이 요구하던 절대 교양을 끊고 쓸쓸하고도 쓸쓸한 장난감 네게 쓰던 분홍색 편지를 끊고 눈뜰 때마다 하루하루 증발하는 향긋한 생의 온기를 끊고 갈수록 아득해지고 초라해지는 물거품 같은 나를 끊고 정신의 비수처럼 섬뜩한 부모 형제들을 끊고 심장이 쿵쿵 뛰고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검은 집착 이 시대의 불타는 사랑을 끊고


  나는 까치밥이 된다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감

  새여, 어서 날아와 나를 따 먹으라

 


  *『시로 여는 세상』2010-겨울호 <이 계절의 신작시>에서

  * 김상미/ 부산 출생, 1990년『작가세계』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이 별똥이 되기까지/ 황희순   (0) 2011.02.18
소묘/ 이영애  (0) 2011.02.10
날아라, 탁자/ 장이엽  (0) 2011.02.08
기러기/ 강태열  (0) 2011.02.07
나는 이렇게 위독하다/ 김승희   (0) 2011.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