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번진 자리를 따라가다가/ 김조민

검지 정숙자 2023. 11. 16. 14:52

 

    번진 자리를 따라가다가

 

     김조민

 

 

  몰래 가져다 쓴 시간과 버린 시간의 저물녘

  책갈피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밤

  불쑥 튀어나오는 이름처럼

  자꾸 펼쳐지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철새들은 그림자를 두고 날아오릅니다

  아무도 좌절하지 않는 나머지입니다

 

  반짝이던 첫 문장은 낡아져 이제

  이렇다 할 단어는 몇 개 없습니다만

  더욱 납작한 마침표입니다

  영원히 쫓기는 환영 같은 것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뜨겁게 불타오르던 것들 모조리

  거짓말이었습니까?

 

  아직 오지 않은 안과 밖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두었습니다

  잘라내지 못한 것은 그대로 두기로 합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자꾸 뻗는 줄기처럼

  늘어가는 빈 페이지에 인기척을 끼워둡니다

      -전문(p.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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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신작시> 에서  

  * 김조민/ 2013년『서정시학』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