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5605

물집/ 이주송

물집 이주송 물이 빠져나가자 바위가 알몸을 드러낸다 여러 갈래의 골목 흡착과 집착이 지나간 자리마다 물비린내를 갉아 먹고 사는 패각류들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호구수 많은 마을 하나 이루고 있다 한 천년은 거주했을 것만 같다 밀착, 또 밀착 일용할 양식의 넓이는 겨우 오 센티 구역을 나누지 않고도 다툼을 모르는 방식이다 빈부 격차마저 없다 물때가 오손도손 포자를 키운다 하루에 두 번 다른 삶을 살게 한다 성장통이나 위기도 있다 새들이 쪼아 먹을 때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갈 때면 온몸으로 변주했던 날들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언젠가는 몸이 집이 되어 게들의 한때가 되었다가 나중엔 아주 나중엔 흰모래가 될 것이다 달라붙어도 좋고 떨어져 있어도 좋을 밟으면 이내 바서질 소인국의 낮은 집들 더부살이 소용돌이 한 줌 등..

폭풍 속으로/ 고주희

폭풍 속으로 고주희 네가 쓴 글을 고쳐 읽고 있다 불어 닥친 북풍은 모든 나무의 가지를 한 방향으로만 뻗게 한다 맹그로브 나무처럼 염분으로 버틴 뿌리들의 시간 빗물에 씻긴 돌의 표정은 먼 데서 온다 저 돌은 한때를 짓누르던 밤 비스킷이 구워지는 오븐과 낮잠 사이에는 뿌리가 뒤집힐만한 비문이 종종, 찻물 온도가 적당히 식어 갈 때쯤 준비된 먹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곤 한다 숲 속의 일몰은 때때로 야만적이다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은 운 나쁜 일들이 구획 없이 흘러간다 없는 애인들을 불러들인다 어떻게든 번개는 치고 불은 빠져나가야 하므로 지금은 속살이 까만 나무의 계절 찻잔에 가라앉은 찌꺼기와 유예되는 뒷모습 사이 안녕이란 말에는 얼마간의 재가 뒤섞여있다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아 얼굴은 다시 시작되는 폭풍인..

Y의 문제/ 이서하

Y의 문제 이서하 그리지 못하는 그래프는 아무 쓸모없다, 이건 수학에서의 정의라고 선생은 말했다 허수는 곱할수록 마이너스가 되니까 그래프로 그릴 수 없다 함수의 정의역과 치역은 모두 실수다 그래 그걸 외우지 못해서 문제가 됐니? 급정거한 바큇자국에 얼마간의 다툼이 멈췄으니 다행이라며 안도하던 표정이? 그 곡선의 흔적이? 죽었다 살아난다고 해도 잠시 멈춘 다툼은 다시 시작될 뿐이야. 너는 말했지. 너로 지칭되는 수가 모두 사라졌으니 이제 갈라서자고. 운전대의 잘못된 방향처럼 말의 방향에 따라 무한히 사람이 나뉜다. 문제를 풀지 못해서 혼이 났어요. 진술은 사건 이후에 필요한 걸까요 왜 마음의 허수는 곱할수록 무거워질까요 왜 구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냐 물으면 문제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만약 수의 ..

여름밤/ 김건영

여름밤 김건영 물속에 있으면 비를 잊을 수 있다 침대도 편지도 없고 마른 것도 없다 몸을 한껏 펼친다 머릿속에서 눅눅한 페이지들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물속은 가득 차 있다 물고기들이 제 몸속으로 음악을 삼키고 있다 배 속에 진회색 구름이 차오른다 물속에는 갈림길이 없다 잠길 수 있다 물속에는 결빙이 없다 표정처럼, 얼음은 언제나 바깥부터 시작된다 목욕도 없다 가끔 숲이 있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나무들 물속에서는 옷장이 필요 없다 그 사이에서 물고기들은 헐벗거나 먹거나 마신다 말없이 그러나 물고기들은 음악을 풍기고 있다 수면이 얼어붙는 동안에도 풍만한 냄새로 가득 찬 움직이는 음표 물속에서 누군가의 뺨을 때릴 수 있었다면, 상대방이 멈추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음악이 있다 물속에는 식탁이 없다 마주 볼 필..

입구에서 멀리 있을수록 진실에서 멀어진다/ 송진

입구에서 멀리 있을수록 진실에서 멀어진다 송진 그들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잠들지 못하는 뇌 속을 개미처럼 파고들었다 꾸준한 일꾼이지 그럼 그럼 끄덕임만이 신경 세포를 자극하였다 부려 먹기 좋은 노새야 저런 녀석 한 마리만 더 있었으면 그런 뜻이었을까 인간의 말 속에는 진실의 말과 거짓의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진실에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입을 다물자 알아듣기도 힘든 말들이니 입을 다물고 진실을 찾아가자 태양 속에도 달 속에도 어디에도 없는 것 지쳐 스스로 땅을 팔 때 순간 섬광처럼 빛나는 것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 한 알을 바라보며 웃는다 어 어 이 사람 왜 이래 환자가 어서 침대에 눕게 그들은 그를 소독향기 가득한 침대에 눕히고 그가 잠든 줄 알고 ..

나주배를 생각함/ 변희수

나주배를 생각함 변희수 나주배가 아니면 배 축에도 못 드는 배가 난전 과일가게에 수북이 쌓여있다 배란 배는 다 나주배로 행세하는 한 철 서로 배다른 자손처럼 영천이니 울산이니 나온 곳은 다 달라도 그게 족보로 따지면 분명 호형호제할 수 있는 한 집안 핏줄 성향을 보면 간단하게 그 집 붙인지 아닌지 한눈에 다 알아볼 수 있다는데 겉이 까칠한 놈도 미끈한 놈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원시원하고 마르지 않는 품성이 영락없이 모두 나줏집 붙이들이라는 말씀 시장 어귀 어디쯤 오다가다 만나도 그게 그러니까 한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라도 나도 나주고 너도 나주라고 우기면 다 일가가 되는 한 철 타지에 사는 피붙이처럼 나주 사는 그 아무개에게 살뜰한 기별이라도 한 장 넣고 싶은 그렇고 그런 저녁 -전문(p. 14..

어머니가 보내주신 식중독/ 박형권

어머니가 보내주신 식중독 박형권 내 입에 한글 넣어주시려고 글이 넘쳐나 세상 사람 상처 핥아주라고 석류나무 회초리로 후려치신 이후로 한 번도 주시지 않던 아픔을 나이 오십 바라보는 아침에 주시니 맛있게 받아먹고 나 데굴데굴 구른다 석화도 꽃이라면 꽃이라 석화젓 먹고 배 속에서 활짝 꽃피는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다 꽃 한 송이 피려면 들판의 흙조차 진통하는데 프리지아 치마 같은 식중독은 간지러운 아픔이다 그러나 보내주신 음식들은 버려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식중독조차도 조물조물 버무려 바리바리 싸서 보낸 엄마 손끝이 아파 어찌해야 하나 아내도 딸 아들도 한 일주일을 구르다가 이제 조금 웬만하다 식중독을 버무릴 때 자칫 엄마 정성 빠졌더라면 지금 모두 무사했을까 늙은 아들에게 엄마라는 항체 생기라고 식중독을 ..

무명작가(無名作家)/ 심보선

무명작가無名作家 심보선 내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종이 깨지는 소리와 현이 끊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펜이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나는 죽음이 야적野積돼 있는 들판이 어디인지 모른다 천재들은 알지도 모르지 나는 천상天上에 아로새겨진 천성天性을 본 적이 없다 천재들은 봤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대충 쓰지 않을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첫 번째 걸작을 서둘러야지 헌사獻詞 따위는 없다 그러나 결국 나는 바치겠지 내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모든 독자들과 존경하는 비평가들에게 -전문(p. 109)// 『다층』 2009-여름(42)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울(100)호 에서 *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불수의적 정체(停滯)/ 전형철

불수의적 정체停滯 전형철 1. 먼 대양에서 길어 올린 전갱이며 고등어들이 골목에 싱싱하다 2. 지나간 사랑에게 일련번호를 매길 때 빗방울은 다른 굴절률을 지닌 렌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이, 우리가 잃어버린 우산들은 어느 하늘에 별자리가 되었던가 뭇별은 구름 위에 문신을 새기고 웅덩이는 다시 구름의 지도를 지상에 부려 놓는다 3. 바람이 나무의 깃을 붙들다 놓쳐 버린다 늑대인간은 핏빛 보름달에 광란하고 정체는 비린내에 발작한다 눈자위가 눅눅하다 -전문(p. 110-111)// 『다층』 2009-여름(42)호 수록作 --------------------- * 『다층』 2023-겨울(100)호 에서 * 전형철/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고요가 아니다』『이름 이후의 사람』

밤바다는/ 정연덕

밤바다는 정연덕 밤바다는 꿈을 먹고 산다 눈웃음으로 노래한다 허리를 흔들며 번득이며 행간을 오른다 밤바다는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의 나팔을 분다 목쉰 아우성에 질펀한 눈꽃처럼 피어난다 스물세 살 청상으로 역사의 결단과 마주한다 -전문(p. 48) *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 多石 유영모(교육자, 종교인 1890~1981, 향년 91세) 선생의 어록에서. 경신학교, 양평학교, 오산학교 졸업 및 오산학교 교장 역임. ---------------------------- * 『월간문학』 2023-11월(657)호 에서 * 정연덕/ 충북 충주 출생, 『시문학』추천 완료(1976.3.~77.1.)로 등단, 시집 『달래江』『블랙홀에 뜨는 노래』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