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동억_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1(발췌)/ 눈을 뜰 수 있다면 : 박은지

검지 정숙자 2024. 2. 3. 02:39

 

  눈을 뜰 수 있다면

 

  박은지

 

 

  활활 타오르는 불을 구경했다

  

  저게 우리의 미래야

  나는 거대한 캠프파이어 같다고 생각했지만

  너의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니 왠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뜨겁고 빛나는

 

  우리가 머물던 의자도 불타고 있을걸

  의자 아래에선 잡초가 적당한 높이로 자라고

  우리가 흘릴 아이스크림을 기대하며 발등을 오르던 개미

  의자 옆에는 결말을 쌓아 만든 돌무더기가 있었다

  돌무더기를 뒤덮은 나무 그림자도 뜨겁게 빛나고 있을까

 

  밤새도록 타는 소리를 들었다

  꿈에선 결말의 비밀이 불탔고

  모든 이야기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들끓는 꿈

 

  새벽은 연기가 점령했다

  아침 냄새와 저녁 냄새를 모두 불에 빼앗겼다

  계곡을 따라 불이 사라진 자리를 걸었다

  검은 하늘 아래 검은 재가 가득했다

  모두 비슷한 색을 갖고 있었다

  발이 묶인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게 불타고도 남은 게 있다니

  미래는 정말 멋지다

  너의 말을 들으니 걸어 볼 마음이 생겼다

  키들키들 웃으며 타고 남은 재를 서로의 얼굴에 묻혔다

  손과 얼굴이 모두 검게 변했다 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비슷한 색을 갖고 있었다

 

  너의 눈동자만 들여다보았다

    -전문, 『여름 상설 공연』(민음사, 2021)

 

  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1)(발췌) _박동억/ 문학평론가

  "우리가 머물던 의자를 불태워서" "거대한 캠프파이어"를 지속하는 이 모순된 상황을 박은지 시인은 시대의 알레고리로 승격하려 한다. "저게 우리의 미래야". 요컨대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는 잿더미라고 시인은 말하는 셈이다. 그들이 발 디딜 장소를 불태워 지속하는 잔치란 무엇인가. 이 캠프파이어의 이미지가 암시하는 바를 곧 무분별한 자연의 소진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들이 소진한 것은 단순히 자원으로서의 세계가 아닌 이 세상과의 근원적 교감이다. 그들은 "아침 냄새와 저녁 냄새를 모두 불에 빼앗겼"으며 "발이 묶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채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 결국 이 작품에 내포한 정조는 대지의 상실로 인한 불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도 세계의 표상은 '불' '냄새' '연기'처럼 반투명한 자연물이기에 명확한 형상을 지니지 못한다. 이 비정형성이 곧 존재를 지지하지 못하는 세계의 상태를 표현한다.

 

      *

  현대시에서 자연이 오직 기호로만 표상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징후이다. 시적 자아는 화사한 여름처럼 아름다운 계절 속에 머물지만, 그것은 발 디딜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은 그저 휘청이는 존재와 함께 흔들리는 풍경이거나 창밖에 놓인 그림일 뿐이다. 이러한 자연 풍경 속에는 근본적으로 자연이 없다. 불안에 떨고 있는 내면의 미기후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안 자연인가. 무엇이 우리에게 삶의 확신을 주는가. 기다려야 할 것은 이에 대한 응답을 힘겹게 모색하는 과정 이후의 순간이다. 현대시는 그 이전까지 우리가 직시해야 할 존재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 진실이란 그저 영문 모를 세상과 그 속에서 사물처럼 놓인 인간의 몸, 그 사이에서 우리의 존재가 상연되고 있다는 부조리이다. (p. 시 256-257/ 론 89-90 *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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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3-7월(403)호 <기획성/ 지금 여기의 생태-시 1> 에서

  * 박은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여름 상설 공연』

  * 박동억/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 200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정확한 리얼리즘 :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